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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밥상을 물리고 신문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큰 소리로 누가 나를 부른다.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정길모씨가 광주리에 논우렁이를 가득 담아 갖고 왔다. 요즘은 우렁이를 잡는 시기도 아닌데 어디서 잡았냐고 물었다.
“올 겨울에 경지정리 하잖아요. 이제 물꽝에 있는 물을 다 퍼내고 말려야 돼요. 그래야 기계작업을 할 수 있어요. 물꽝에서 물을 다 퍼내고 잡은 거예요. 목사님이 잘 잡수실 것 같아서 갖고 왔시다.”
논우렁이는 씨알이 아주 굵지는 않고, 2-3년 정도 자란 것 같다. 그 다음날 아내는 우렁이를 삶아 밤늦게까지 우렁이 속 알맹이 빼내 용기에 담아 냉동고에 보관해 두었다. 된장찌개 할 때마다 조금씩 넣으면 구수하고 좋다.
정길모씨가 전해준 말을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교동의 명물 물꽝이 형체도 없이 사라질 때가 온 것이다.
물꽝의 수명은 적게는 수십년 길게는 수백년이 되었다. 예전에 지하수가 없을 때에는 물꽝이 작은 저수지 용도로 쓰였다. 물꽝을 만들기 위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두레를 조직하여 기계장비도 없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고 흙은 지게로 져 날랐다.
물꽝의 크기도 다양하다. 작은 것은 수십평 규모이고 큰 것은 수백평되는 것도 있다. 물꽝의 깊이는 대략 두 길 정도 된다.
인공으로 저수지를 만들어 빗물을 모아두었다가 모내기 때 사용했다. 물꽝이 달린 논은 다른 논에 비해 값이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한다. 물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물꽝은 교동 사람들의 생명의 보고(寶庫)였다. 물꽝이 없으면 농사짓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물꽝에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 모내기 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는데, 그것도 요즘처럼 모터로 물을 퍼내 논에 대 준 것이 아니라 일일이 다 사람 손으로 했다.
처음에는 ‘용두레’라는 것을 이용했다고 한다. 긴 장대 3개를 삼각형으로 세우고 거기다 나무로 만든 물 푸는 도구를 매달아 그것으로 물을 펐다고 한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무자우’였다. 염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레방아처럼 생긴 것 위에 올라가 발로 밟아 물을 펐다고 한다. 우리 교회 서순장 장로님께 여쭤 보았다.
“아이고, 말마시겨. 처음 무자우를 배울 때 고생 많이 했시다. 무자우를 지게로 지고 가서 물꽝에 내려놓고 무자우에 올라가서 밟아야 하는데, 균형을 잡을 수 없으니 큰 막대기를 양쪽으로 세워놓고 넘어질까 그걸 잡고 했시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막대기를 잡지 않고 무자우 위에서 막 뛰어 다녔지요.
그런데 논이 물꽝보다 높으니 무자우를 옮겨가며 무자우질을 했시다. 그래야 높은 논까지 물이 가지 않겠시꺄? 그 무거운 것을 지고 다니면서 일을 했는데 완전 중노동잇시다. 요즘 농사야 거저 먹기지요.”
모내기를 하고 나면 물꽝에 물이 하나도 없다. 다시 그해 여름 장마 때 물을 채운다.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 전부터 그렇게 해온 것이다. 물꽝은 농민들의 수고와 땀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다. 그것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늘 오후 사진기를 들고 물꽝이 많이 남아있는 농장쪽으로 나갔다. 경지정리(耕地整理)를 앞두고 모터로 물을 푸느라고 바쁘다. ‘웅’하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기분을 묘하게 만들어 준다.
물꽝은 똑같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생김새가 다르다. 원형으로 생긴 것도 있고, 길죽한 것도 있고, 네모반듯한 것도 있다. 논 생김새에 맞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기도 다르다. 물꽝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물꽝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밀려온다. 물꽝은 교동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온 생명의 젖줄이요, 어머니의 젖가슴이었다. 이제 사람들이 파 놓았던 것을 기계가 다 흙으로 메워 평지가 될 것이다. 밥 먹다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다.
물꽝은 물 말고도 많은 이야기와 추억을 담고 있다. 교동에는 강이나 개울이 없다. 옛날에는 여름철 아이들의 물놀이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물꽝에서 헤엄치는 것을 배웠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달밤에 물꽝에서 멱을 감았다. 지금도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젊은이들은 갈대숲에서 연애를 했다. 모내기를 끝내고 물꽝에 물이 마르면 가물치나 붕어를 잡아 술안주를 했다. 모든 사람들이 물꽝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물꽝에서 물놀이를 하다 빠져죽은 아이들도 있었다.
수십년 아니 수백년동안 교동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온 고마운 물꽝, 교동 사람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물꽝이 곧 자취를 감춘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 농장에 있는 수십 개의 물꽝을 돌아보면서 인사를 했다.
“물꽝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인사를 모두 마치고 돌아서자 이런 울림이 들려온다.
'괜찮아. 내가 땅에 묻히지만 내가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아냐. 내가 땅에 묻힌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이야.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아.'
내 등산화는 어제 내린 비로 진흙 범벅이 되었다. 물꽝의 대답을 듣고 나니 조금 위안이 된다. 오늘 따라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바로 그때 기러기 한 떼가 ‘쏴아’ 소리를 내며 낮게 비행을 하며 지나간다. 이제 물꽝에 얽힌 풍상도 추억도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모양이다. 그리움만 남긴 채. 서해안 저녁노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