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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떠오르기 전 동쪽 하늘의 황금빛이 눈부시다.
해 떠오르기 전 동쪽 하늘의 황금빛이 눈부시다. ⓒ 정철용
그 화산에서 맞이하는 해돋이가 장관이라고, 이번에는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처남은 자꾸 우리의 등을 떠민다. 2주간의 인도네시아 일정이 이제 다 끝나가니 그럼 마지막으로 그곳에 다녀올까? 반둥에서 뺨맞은 것을 수라바야에서 풀고 오는 것도 괜찮을 성 싶어서 우리는 다시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처남과 함께 살고 계신 장인어른과 장모님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짜리 조카와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공항에서 낙오자가 되어 2시간 늦게 출발하다

그런데 우리끼리 다닐 때는 괜찮더니만 어른들을 모시고 가는 그날따라 교통체증이 너무나 심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와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8시 50분. 평소 걸리는 시간의 두 배가 더 걸렸다. 결국 9시에 출발하는 수라바야행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오랫동안 직업군인 생활을 하셨던 장인어른의 말씀을 빌리자면 우리는 졸지에 '낙오자'가 된 셈이었다.

우리는 '낙오자 처리반'(?)에 우리 일행 여섯 명의 이름을 올려놓고 다음편 비행기에 빈 좌석이 나기만을 기다렸다. 10시 비행기에 빈자리가 나지 않자 나는 몹시 초조해졌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여섯 명이나 되는데 과연 빈자리가 한꺼번에 나올 수 있을까? 처남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아예 아직 자리가 있는 오후편 비행기로 새로 예약을 해야 하는 것이 어떨지를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인어른께서는 조금 두고 보자며, 낙오자답게 낙오자 처리반의 처분만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계셨다. 마침내 10시 30분이 지나자 낙오자 처리반의 직원이 나를 향해 손짓을 보내왔다. 운 좋게도 11시 비행기에서 여섯 자리 모두가 나온 것이다! 이 행운은 분명 나의 초조함이 아니라 장인어른의 느긋함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했다.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수라바야 공항에 도착한 우리를 현지의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처남이 미리 여행사에 알려주어서 이들도 우리의 늦은 출발을 이미 알고 있었던지 전혀 불평이나 군소리가 없었다.

태양이 쏘아보내는 황금빛 화살에 나는 환성 대신 침묵으로 답했다.
태양이 쏘아보내는 황금빛 화살에 나는 환성 대신 침묵으로 답했다. ⓒ 정철용
우리는 에어컨이 시원찮은 8인승 승합차를 타고 수라바야 시를 벗어나 남쪽으로 한참 달렸다. 쁘로볼링고라는 작은 마을 못 미쳐서 차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덜컹거리며 산길을 20분쯤 올라가니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 큰 건물이 서 있었다. 그랜드 브로모 호텔. 우리가 묵을 숙소였다.

본격적인 일정은 다음날 새벽 3시 30분부터 시작될 예정이라며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우리가 호텔 투숙 절차를 마치자 물러났다. 산 아래 전망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야외수영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영을 즐겼다. 제법 물이 차가웠다.

제비 몇 마리가 수영장의 물 위에 떠 있는 벌레를 보았는지 낮게 비행하면서 물수제비를 떴다. 저런 제비를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제법 다양한 새들을 볼 수 있는 뉴질랜드에도 제비는 없으니 분명 한국에서였을 터인데, 그게 언제 적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봄이 와도 돌아오지 않는 제비들이 모두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

알전구들을 가로등 삼아 어두운 산길을 달리다

다음날 새벽 3시. 모닝콜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우리는 서둘러 옷을 차려입는다. 밤을 지새워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보기는 아마도 내 생애에서 처음인 것 같다. 베란다에 나가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는 별들과 묵직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세상이 너무나 고요해서 숨쉬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지경이다.

호텔 로비에는 가이드와 기사가 벌써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2시 30분에 일어났다고 한다. 남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에 깨어나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세상을 만끽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일까. 그러나 그 시간이 그들에게는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내 말이 어쩌다가 새벽에 깨어난 이의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섬세한 주름이 아름다운 바톡산과 하얀 유황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브로모산. 그 뒷편 중앙에 스메루산도 보인다.
섬세한 주름이 아름다운 바톡산과 하얀 유황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브로모산. 그 뒷편 중앙에 스메루산도 보인다. ⓒ 정철용
로비 한 구석에 마련된 뜨거운 차를 한 잔씩 마시고 우리는 출발한다. 차는 어두운 산길을 구불구불 느릿느릿 간다. 그 길을 따라 양 옆으로 집들이 드문드문 서 있고 그 집들의 처마에는 어김없이 환하게 불을 밝힌 알전구들이 매달려 있다. 그것은 분명 어둠 속 산길을 오르는 차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짙은 어둠 속 험한 산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걱정했는데, 이렇게 불 밝힌 따스한 마음들이 있었구나. 알전구 주위로 퍼지는 불빛이 너무나 안온하다.

그 알전구들을 가로등 삼아 20여 분쯤 달렸을까. 모자를 쓰고 두꺼운 점퍼를 걸친 한 떼의 키 작은 남자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호텔에서 얻은 지도로 확인해 보니 쩌마랄라왕 마을이다. 작은 지프차들이 비좁은 길의 여기저기에 웅크리고 있다. 그 중 한 지프로 우리는 갈아탄다. 여기서부터는 더 험한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일 게다.

일출과 유황 연기 솟아오르는 화산을 보다

예상대로 길은 더 험해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지프는 요동을 치며 달린다. 길을 비춰주던 알전구들도 없고 이제 오로지 조그만 지프차의 헤드라이트와 운전수의 손만 의지해 달린다. 그 어둠 속의 50여 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내려오는 길에 본 스메루산이 시커먼 연기를 분출하고 있는 장면
내려오는 길에 본 스메루산이 시커먼 연기를 분출하고 있는 장면 ⓒ 정철용
마침내 일출을 바라보는 전망대가 있는 빠난자칸산(2740m)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4시 50분. 전망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다. 우리는 긴 팔 웃옷을 하나 더 걸쳤을 뿐인데, 모자를 쓰고 두터운 파카를 입고 장갑까지 낀 사람들도 있다.

해가 곧 떠오르려는지 동쪽 하늘 지평선 부근 산 주위에서 시작된 황금빛이 점점 넓어지면서 짙은 군청색 하늘을 자꾸 위로 밀어낸다. 그에 따라 지평선 아래 짙은 어둠도 점점 밝아지면서 그 정체를 드러낸다. 온통 구름바다다. 저 구름바다를 헤치고 우리가 올라왔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천상의 세계에 있는 것인가.

온몸에 스미는 감동을 말없이 즐기고 있는데 드디어 태양이 산의 뒤편에서 첫 햇살을 쏘아 보낸다. 5시 15분. 황금빛 화살을 맞은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지른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경배하기를 말없는 침묵으로 대신한다.

그 어디에서나 해돋이는 장엄한 풍경이다. 스무 살 무렵 북위 38도 한국의 동해안 바닷가에 맞았던 해돋이든, 새로운 천년의 새벽에 세계인들과 함께 지켜본 남위 38도 뉴질랜드 기스본의 일출이든, 그리고 마흔이 되어 그 중간쯤 적도에 가까운 인도네시아의 브로모에서 내 심장을 관통한 태양의 화살이든 간에 말이다.

일출의 순간은 짧아서 사람들은 이내 하산을 서두른다. 우리는 전망대의 남쪽 방향으로 구름바다 속에 마치 섬처럼 솟아있는 듯한 화산들을 다시 눈에 담는다. 원추형의 산정에서 내려오는 선명한 초록빛 능선들이 마치 주름처럼 잡혀 있는 앞쪽의 바톡산(2440m)과 그 왼쪽으로 하얀 유황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잿빛의 브로모산(2392m)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저 구름바다 아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저 구름바다 아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 정철용
여기에 그 뒤 연봉들 너머 보이는 스메루산(3676m)의 위용은 새벽 3시에 일어나 1시간 30여 분을 어둠 속 험한 길을 달려온 우리의 노고에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는다. 특히 스메루산은 마치 화산 폭발을 재현하여 보여주듯이 간헐적으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는데, 우리가 전망대에 도착하기 몇 분 전쯤에 분출이 있었는지 구름처럼 보이는 잿빛 연기가 스메루산의 산정에서 길게 이어져 있다.

15분마다 이루어진다는 시커먼 연기의 분출이 30분이 지나도 기미가 안 보인다. 가이드가 하산을 권유한다. 구름바다 저 아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또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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