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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나는 아침밥을 안 먹은 지 거의 10년쯤 된 것 같다.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꼬박 매끼를 챙겨 먹는 것도 그렇고, 대신 아침에 과일 한 쪽에 녹차를 한 잔 마신다. 속이 편하고 좋다. 아침 식사를 건너뛰고 오전 11시 30분경,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나는 채식, 육식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다. 아내가 아침부터 바빠 토요일이라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아딧줄이 대신 밥을 차려 주었다. 김치찌개를 만들어 주어서 맛있게 잘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신문을 읽고 어느 잡지사에 보낼 글 한 꼭지를 썼다. 12월 초 출간될 내 산문집 원고 교정도 보았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쯤 된 것 같다. 그런데 내 서재 안으로 고소한 냄새가 문틈 사이로 들어온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딧줄이 끓인 라면을 아내와 아딧줄, 넝쿨이 셋이 머리를 맞대고 냄비째 밥상 위에 놓고 라면 건더기를 건져 먹고 있었다. 라면을 건져 먹는 폼이 사뭇 전투적(?)이다. 오후 2시가 넘어서 이제 점심밥을 대신해서 라면을 먹는 것이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아내와 애들은 먹어보란 말도 하지 않는다.

세 모자(母子)가 라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딧줄에게 물었다.

"야, 라면 몇 개 삶았니?"
"3개요."

고작 라면 3개를 삶아 놓고 먹으니 전투적으로 먹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여섯 개 삶았다면 한 젓가락 얻어먹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얻어먹긴 틀렸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다.

"라면을 3개를 삶았다니 한 젓가락도 못 얻어 먹겠네. 많이 먹어라."

그랬더니 아내가 그러지 말고 그럼 한 젓가락만 먹어 보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못 이기는 척 하고 끼어들었다.

"실은 내가 라면 국물이 먹고 싶어서 그래, 건더기는 안 먹고 국물 한 국자만 먹을게."

그런데 냄비를 보니 돼지고기 비계도 둥둥 떠 있고 계란도 풀어 놓았는지 완전 잡탕이 아닌가?

"야! 라면에 돼지고기를 넣고 삶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러자 아내가 거들고 나선다.

"돼지고기를 넣으면 맛이 어떻게 될까 다 궁리하고 넣은 것이니 타박하지 마세요."

ⓒ 느릿느릿 박철

내가 또 라면 삶는 데 일가견이 있는지라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라면에 계란도 넣지 마라. 그래야 국물이 시원해."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으면 라면을 넣기 전에 김치를 넣고 먼저 끓이다가 라면을 넣으면 국물이 얼큰하고 좋아. 알았냐?"
"군대에선 양은 주전자에 그런 방법으로 라면을 끓여. 얼마나 맛있는지 아냐?"

여기까지 내 라면 강의가 막힘 없이 잘 나가는 듯 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툭하고 말을 던진다.

"당신 군대 갔다 왔어? 방위들도 양은 주전자에 김치 넣고 라면 삶아 먹나 보지."

그러면서 자기가 그 말을 해놓곤 자지러지게 웃는다. 이번에는 잠자코 라면을 먹고 있던 아딧줄이 한마디 한다.

"아빠, 아빠는 007가방 들고 출퇴근 했어요? 아니면 내무반 생활했어요?"

이놈은 다 안다는 듯이 한 수 더 뜬다. 아내는 더 크게 웃는다. 나도 국자로 라면 국물을 마시다 아내가 웃는 바람에 사레가 들려 연신 재채기를 했다. 막내 넝쿨이는 아내와 내가 왜 웃는지 모르고 "엄마 왜 웃어요? 뭐가 웃기다고 웃어요?"한다.

아딧줄의 질문에 "야, 임마! 아빠는 방위 출신이라도 끗발이 있었어!" 그렇게 대답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이들 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품위 유지에 더 유리할 것 같아 다시 서재로 들어왔다.

고 3때 예배당 짓는 데 공사 현장에 올라갔다 떨어져 척추를 다친 것 때문에 나는 신체검사에 불합격 판정을 받아 현역 입대를 하지 못하고 보충역으로 군대 생활을 대신했다. 어디서든지 군대 얘기만 나오면 나는 놀란 자라 모양 목이 쏙 들어가고 만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그것이 무슨 약점이나 결격사유가 된단 말인가. 주눅들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방위병 시절, 양은 주전자에 김치를 넣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현역병이 아니니 식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찌그러진 뚜껑도 없는 양은 주전자에 김치를 넣고 김치가 익기도 전에 라면을 넣는다. 화력이 좋은 석유 난로 위에서 라면이 끓는다. 그러면 서너 명의 고참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설익은, 꼬들꼬들한 라면 면발을 건져 먹었다. 방위병도 엄연히 고참이 있고 군번도 있다.

ⓒ 느릿느릿 박철

내가 할 일은 고참들이 먹고 난 양은 주전자를 닦는 일이었다. 양은 주전자를 닦기 전에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남아 있는 라면 국물을 마셨다. 아내는 내가 방위병 출신이라고 무슨 푼수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부끄러울 것도 창피할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자꾸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자라목이 되는지 나도 모르겠다.

가끔 다 찌그러진 뚜껑도 없는 양은 주전자에 라면을 끓여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 다시 그 보충역 시절로 돌아가란 말인가. 그럴 수야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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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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