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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새벽 6시 20분 인천 국제공항은 한국을 떠나려는 비슷비슷한 모습의 외국인들로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북적거렸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자진 출국 만료일. 그들의 운신의 폭을 줄이는 이 냉정하고 야속한 나라를 섭섭히 여길 터인데도 그들의 눈동자는 곧 도착할 고향 생각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동안 한국에서 조금씩 사 모은 선물 보따리들이 실려있는 짐 수레가 이를 증명하는 듯했다.

나는 이 많은 인파에 취해 순간 멍해졌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삼성동 공항터미널에서 수속을 하겠으니 비행기 티켓을 미리 달라고 여행사에 통사정을 했건만 불가하다고 하더니 결국에는 이런 사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싼 그룹 티켓으로 필리핀 구경을 저렴하게 하려던 나로서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예정된 시간은 다가오고 필리핀 행 비행기에 올라탔건만 출발 시간이 1시간이 지나도 출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복잡한 공항 덕에 아직 수속을 하지 못한 승객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란다.

영종도 갯벌 전체를 아예 아스팔트로 메어버린 듯한 위풍당당함, 그 거대한 규모로 동북아 허브를 꿈꾼다는 인천국제공항의 자존심이 이 나라를 떠나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산인해로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 필리핀의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니노이 아키노가 공항에 배치된 저격수에 의해 암살당한 곳이다.
ⓒ 김정은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는 필리핀을 향해 출발했다. 이제 3시간 30분 정도가 되면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NinoyAquin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다. 마닐라 시내에서 약 10km정도 떨어져 있는 니노이 아키노 공항의 정식 명칭은 마닐라 국제공항 그렇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마닐라 공항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줄여서 NAIA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바로 마르코스 독재 시절 미국으로 망명했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부군이었던 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 고국에 돌아가서 죽겠노라고 귀국을 강행하다가 공항에 배치된 저격수에 의해 암살 당했던 공항이기 때문이다.

"니노이 아키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노란 손수건이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필리핀 국민들이 걸어놓았다는 노란 손수건은 그 후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 선거 유세시에 사용해서 성공했고, 물 건너 한국까지 와서 김대중 대통령의 선거유세에까지도 동원되었으니 매우 유명한 상징이다.

또한 그보다는 토니 올란도의 노래 "Tie A Yellow Ribbon Round Old Oak Tree"의 가락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마치 형기를 마치고 집에 되돌아가는 죄수가 된 것처럼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자유롭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비좁은 공항을 슬슬 빠져 나왔다.

그러나 나의 설레는 기분과는 달리 무척 헷갈리는 공항 출구를 나오니 옷자락을 잡을 것처럼 가깝게 접근하며 택시 호객하는 사람들, 뭔가 팔려는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로 북적북적 혼잡해서 은근히 겁이 났다.

기내에서 우연히 만났던 필리핀 부부가 몸조심하라고 귀띔했던 기억이 나서일까?

그네들도 역시 사람인데 이렇게 지레 겁 먹고 있는 나 자신도 편견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자답하다보니 어느덧 관광버스는 메트로 마닐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 필리피노들에게는 지금이 건기인 겨울이라지만 이방인에게는 숨막힐 정도로 푹푹 찌는 마닐라의 아스팔트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그렇게 마닐라 여행은 시작되었다.

마닐라에서 수많은 별을 만나다

▲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별모양의 등
ⓒ 김정은
▲ 버스 유리창에 언뜻 비친 별모양의 구조물 패롤(parol). 거리마다 구석구석 이처럼 소박한 모습의 패롤들이 필리핀 사람들의 소망을 전하고 있다.
ⓒ 김정은
11월의 필리핀은 누가 뭐래도 별의 나라다.

카톨릭 국가인 만큼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이 바로 크리스마스이고,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카운트에 들어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지금 필리핀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시즌임에도 거리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찾기 힘들고 대신 거리 구석구석 꽂거나 매달린 소박한 별 모양의 구조물을 보게 된다. 패롤(parol)이라 부르는 이 별 모양의 장식물은 가장 대중적인 필리핀의 크리스마스 상징인데, 오각뿔의 별은 베들레헴의 별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동방 박사가 발견한 별을 의미한다고도 한단다.

버스 창가에서 스치듯 지나치는 거리에는 여러 모양의 패롤과 함께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있었고, 동방박사와 예수를 기다리는 그 작지만 소박한 별들이 그들의 희망을 얘기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 가슴에 그들이 바라는 별이 빛날 수 있을까?

한개의 별을 가진건 한개의 지구를 갖는것
아롱진 설움밖에 잃을 것도 없는 맑은 이 땅에서
한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 날의 기쁜 노래를
목안에 핏때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보자 ...

이육사/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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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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