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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무스따 까!, 따갈로그어로 아침 인사를 하다

필리핀의 둘째날 아침은 또글또글 구르는 듯한 그네들의 언어인 타갈로그어 억양이 물씬 배어들어 알아 듣기 어려운 모닝콜로 시작되었다.

필리핀이 영어국가라서 모두 영어를 쓰는 줄 알았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그네들은 주로 영어보다 그네들의 언어인 따갈로그(Tagalog)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호텔 엘리베이터 속이든 로비에에서든 거리에서든 심지어는 공항의 출입국관리소같은 곳에서도 필리핀 사람 두 사람만 모이면 그 예의 둥글둥글 구르는 듯한 따갈로그어가 귀 아플 정도로 들린다.

필리피노들이 필리핀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처럼 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나는 왜 그러한 당연한 모습을 보고 어색해 했을까?

내 행동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필리핀에 와서 낯익은 맥도널드나 KFC같은 다국적 체인점 간판을 보면서 "아! 이곳에도 이런 것들이 있었네!"라고 신기했다는 우스개 소리에 나오는 사람보다 더 촌스러운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네들이 외국인을 배려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인 영어 발음에도 이 따갈로그식의 구르는 억양이 배어나와 가뜩이나 영어에 서툰 이방인들을 두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네들의 따갈로그어는 여기가 바로 필리핀이라는 느낌이 새록새록 들 만큼 너무나 필리핀적인 개성을 잘 나타내주는 문화임에 틀림없다.

오늘 아침 맨처음 만나는 필리피노에게 용기를 내어 따갈로그어 인사를 던져보았다.

"구무스다 까 (Kumusta ka, 안녕하세요)?

기찻길 옆 판자촌 이야기

▲ 버스 창가에 스친 기차길 옆 판자촌의 풍경, 녹 슨 양철지붕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위태위태하면서도 한껏 태양빛에 달구어져 숨가쁜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 김정은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는 동요처럼 우리나라 또한 기차길 옆의 오막살이 하면 어딘지 모르게 후줄근하다. 더군다나 필리핀의 열차시스템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운행되었다는 역사적인 자랑이 무색하리만큼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

열차속도도 느리고 운행횟수도 마닐라(Tayuman역)에서 1일 2차례밖에(오후 4:30, 6:30) 운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때 이 기차를 '쓰레기기차'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그 사연인 즉 워낙 기차 속도가 느리다 보니 그 옆의 판자촌 사람들이 쓰레기가 잔뜩 담긴 쓰레기봉투를 들고 서있다가 기차가 지날 때 기차 지붕으로 던져서 생긴 이름이라 것. 기차는 이 쓰레기들을 지붕 위에 가득 실은 채 심한 악취를 풍기면서 종착역에 도착해서야 지붕에 있는 쓰레기를 치웠단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필리핀 정부는 이 같은 쓰레기 투척을 막고자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뾰족 지붕의 기차를 출현시켰다. 보기보다 그 효과가 좋아 사람들이 기차로 던진 쓰레기는 던지는 족족 미끄러져 땅바닥으로 떨어져 쓰레기 투척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뾰족지붕 기차의 생산이 중단돼 지붕이 평면인 보통 기차와 혼재되어 운행된다는데, 그 모습을 볼길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었다. 대신 기차길 양 옆으로 죽 줄지어 있는 양철지붕의 판자촌만이 쓰레기 투척 상황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이 뜨거운 여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녹슨 양철지붕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이 위태위태하면서도 한껏 태양빛에 달구어져 숨가쁜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줄이 끊어져내릴 만큼 다닥다닥 널린 그 많은 빨래와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이 기차길 옆의 판자집촌은 전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마닐라 내의 빈민촌 '톤도'보다는 좀 나은 편이라니 '톤도'라는 빈민촌의 상태는 과연 어떨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들의 삶을 필리핀 민족 특유의 느릿느릿한 게으름(?)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지금 이들의 물질적인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을까?

문득 그물침대 위에 누워 늦잠을 자고 있는 필리핀 남자 옆으로 자녀인듯 싶은 대 여섯 명의 아이들이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그 천진스런 모습이, 세속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그 눈동자가 내 마음 속을 빤히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아프다. 마음 속으로 그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는 나의 적당한 속물스러움이 더 실망스럽고 아팠다.

▲ 팍상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빽빽한 야자수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 김정은
팍상한 카누지기 부자의 소중한 땀방울

팍상한 폭포는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배경으로도 사용될 만큼 우리나라 관광객들에 잘 알려진 명소이다.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으면 마닐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2시간 정도 걸린다지만 이곳 필리핀의 교통체증 또한 우리나라 못지 않아서 막힐 때는 4~5시간은 걸린다.

우여곡절 끝에 팍상한에 도착한 후 물에 젖지 않기 위해 지갑이며 카메라며 모자 등을 비닐봉지에 여러겹 싸서 단단히 준비하고 급류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카누를 타기로 했다.

카누는 관광객 두사람이 가운데 타고 사공 한명은 카누 앞에서, 사공 한 명은 뒤에서 노를 젖는 구조로 되어있다. 보통 관광객 중 몸무게가 더 나가는 한 명이 방카라고 불리는 나무배의 가운데 의자에 균형을 잡고 앉고 나머지 가벼운 사람이 뒷 사람 바로 앞에 탄다.

그러면 앞 뒤에서 사공 두 명이 배를 끌고 당기며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데, 처음에는 얼핏 조금만 움직여도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꼭 물에 빠질 것 같아 무섭기도 한다. 사공 또한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center, center"를 연호하니 더욱 무서울 수밖에.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이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팍상한의 절경이 눈안에 들어온다.

▲ 태고의 원시림을 생각나게 하는 팍상한의 수직절벽
ⓒ 김정은
▲ 팍상한 폭포로 가는 도중 석회석 절벽 곳곳에서는 소규모의 폭포들을 볼 수 있다.
ⓒ 김정은
물 속에서 또아리를 틀며 자생하는 수생나무의 모습이며, 하늘을 가릴 듯이 울창한 야자수와 수직 절벽의 자태를 보니 마치 정글 속을 헤매는 기분이다. 강바닥에서는 갑자기 입을 벌린 악어가 튀어나올 것 같은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배는 어느덧 급류에 도달했고 급류에 가까워 올수록 앞 사공의 몸놀림이 민첩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카누에서 급하게 내렸다, 올랐다 하는 행동을 반복하더니 그 횟수가 점점 빈번하게 이뤄진다. 덕분에 배안으로 튀어올라오는는 물세례 또한 장난이 아니다.

무서움을 이기고 비닐봉투에 넣어두었던 사진기를 꺼내 앞의 사공을 찍으니 카메라를 의식한 사공은 기분이 좋았는지 나름대로 멋있게 보이기 위해 물도 열심히 튀기고 돌부리에 부딪칠 듯 긴장감도 조성하면서 더욱 열심히 카누를 끌고 당겼다.

문득, 물방울인지 땀방울인지 분간 못할 정도로 흠뻑 젖어버린 사공 이마의 물방울을 보면서 아까 보았던 마닐라의 기차길 옆 판자촌 사람들이 오버랩된다.

자신의 노력과 땀방울로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이 사공의 모습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또 있을까? 그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인간에게 있어 노동이란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는 고귀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팍상한 폭포 근처에서 다시 땟목으로 바꿔타니 사람들을 가득 태운 땟목은 느릿느릿 팍상한 폭포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폭포에 근접할 수록 고막이 찢어질 듯 우두둑하는 폭포물 소리와 함께 주먹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것같은 엄청난 기세의 폭포물이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몸은 물보라에 모두 젖었고 처음에는 그 폭포소리와 수압에 당황했지만 지나고 보면 갑갑했던 머리 속 전체가 시원하게 뻥 뚫리는 듯했다. 몸도 마음도 모두 흠뻑 젖었지만 알 수 없는 속 시원함이 약간의어색함을 상쇄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뗏목에서 내려 다시 카누를 탔다. 카누로 되돌아오는 길은 자연스럽게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라 속도감이 있었다. 간혹 카누 안에 물이 들이쳐 물바다가 되는데, 그 때마다 사공은 조그맣게 생긴 나무 조각으로 물을 퍼내곤 했다.

바가지 모양도 아닌 것이 이색적이라 손으로 만져보면서 궁금해 하니 바나나 줄기를 잘라 만든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얼핏 물에 불은 대나무 줄기 같아 보였는데…. 왜 이들은 하필이면 물 푸는 도구로 바나나 줄기를 사용했을까? 그만큼 바나나가 흔해서 일 수도 있고 가볍고 다루기 쉬워서 일수도 있겠지.

앞 사공이 강물 위에 예쁘게 떠있는 하얀 꽃을 꺾어서 나에게 건넨다. 꽃이름은 물백합이라고 했다. 물백합이라. 이 낯선 땅에서 이름 모를 낯선 사공에게 꽃을 받으니 갑자기 내가 신라시대의 수로 부인이 된 듯한 느낌이다.

자줏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작자미상/헌화가


헌화가의 사정을 알리없는 그네들이야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꽃을 따주었겠지만 말이다.

어느덧 카누는 원점으로 되돌아왔고 온 몸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하루의 절반이 지나갔다. 고생한 카누지기 부자와 헤어지면서 그들에게서 배운 따갈로그어 한마디를 건넸다.

"살라뭇! 살라뭇!"(Salamat, 감사합니다)

팍상한의 카누지기 부자

▲ 위험한 급류를 아슬아슬하게 거슬러 오르는 사공의묘기는 신기에 가깝다.

한국말을 매우 잘한다는 나의 격려에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이라며 또렷한 한국말을 하던 앞의 사공과 뒤의 사공은 알고보니 부자지간이었다.

매일 몇 시간씩 이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이 사공 놀란 눈으로 '이 힘든 것을 어떻게 매일 하느냐'는 표정으로 "일주일에 한번 왔다갔다 하는게 그만이고 나머지 시간은 농사를 짓는다든지 다른 일을 한다"고 말한다.

주업보다 더 짭짤한 부업이라서 그런지 나름대로 이 팍상한에는 사공조합이 결성되어 있어 아무나 카누지기가 될 수 없단다. 조합에 소속된 사람들만이 교대로 카누를 몰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고는 노인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또한 카누를 몰 때는 미묘한 손놀림과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에 친구끼리 몰지 않고 주로 부자지간이거나 형제지간끼리 짝을 지어 카누를 운행한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급류를 뜷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거의 카누를 맨손으로 잡아당기듯 하는 이들을 보면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들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 현재 필리핀에서 이들의 수입은 꽤 고소득에 속한다.

이 팍상한 카누 타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대략 90달러에, 방석대여료, 사공팁으로 10달러가 더 든다. 필리핀 급여수준을 감안한다면 이를 리조트 측과 수입을 나눈다고 해도 카누지기 부자의 수입은 꽤 나 높은 편인 셈이다. 물론 정당한 땀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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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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