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9일 저녁 열린 촛불시위 1주년 기념행사에서 '1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는 항의의 표시로 참가자들이 성조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29일 저녁 열린 촛불시위 1주년 기념행사에서 '1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는 항의의 표시로 참가자들이 성조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촛불시위는 애초 암묵적 약속이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질 지 안 이루어질 지는 닥쳐봐야 알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이 됐다. 한 네티즌의 진심 어린 제안이 수천 네티즌을 '오프라인'으로 끌어냈다."

지난해 11월 30일 씌어진 <오마이뉴스> 기자칼럼인 '기자의 눈'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 문장을 이렇게 바꿔야 할 것 같다.

"한 네티즌의 진심 어린 제안이 수백만 네티즌을 1년간 촛불 들게 만들었다."

네티즌의 자발적 참여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첫돌을 맞았다. 지난 해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한다, 광화문을 우리의 영혼으로 채우자, 광화문에서 미선이 효순이와 함께 수천 수만의 반딧불이 되자"라는 내용의 인터넷 게시물이 단초가 돼 광화문에 촛불이 밝혀진 지 1년이 됐다.

지난해 시작된 네티즌의 '주말 촛불시위'는 첫날인 11월 30일에 1만, 일주일 뒤인 12월 7일에는 5만, 또다시 일주일 뒤인 12월 14일에는 10만의 네티즌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연일 '기록갱신'의 역사를 쓰며 네티즌의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촛불을 옮기게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03년 11월 29일.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또다시 600여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왔다.

1년간 이어진 촛불집회는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남겼을까. '불평등한 한-미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살인미군 처벌', '부시 미 대통령 공개사과' 등 촛불의 염원은 어느 것 하나 이뤄진 게 없다.

하지만 29일 '1주년 촛불집회'에서 만난 시민들은 그럼에도 '촛불'이 지난 1년간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노라고, 촛불이 있었기에 현실은 바뀌었노라고 입을 모았다.

범대위 간부 3명 구속... 그래도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우리의 요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촛불은 분명히 현실을 바꿨다. 파병반대의 촛불로 승화됐고, '대구 지하철 참사'를 기억하고 망자를 추모하는 촛불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촛불을 들었고 이제는 부안 군민도 든다. 촛불집회가 평화로운 시위 문화, 새로운 시위의 방법으로 정착된 것이다."

채희병 여중생범대위('미군 장갑차 고 신효순·심미선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사무국장은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중생범대위는 지난 360여일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촛불집회를 개최했다.

채 사무국장의 말대로 한 때 '반미행위'로까지 치부됐던 효순·미선양의 '추모촛불'은 지난 해 말에는 '반전촛불'로 이후에는 '파병반대' 촛불로 승화됐다. 부안 군민들은 '반핵촛불'이란 이름으로 110여일간 집회를 이어오고 있다.

국내뿐만이 아니라 20여개국에서 해외동포들이 동시 촛불집회를 열었다. 지난 해 12월 31일에는 <오마이뉴스>와 여중생 범대위가 공동으로 '지구촌 촛불 파도타기' 행사를 주최해 세계 각국의 교포들이 촛불을 들기도 했다. 채 사무국장의 말대로 촛불은 분명히 현실을 바꿨다.

하지만 지난 1년여간 광화문을 지켜온 '죄'로 여중생범대위 간부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지난 3월 검·경은 돌연 지난 해 12월부터 2월까지 이어진 촛불집회를 '미신고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여중생범대위 간부 8명에게 출두 요구서를 발부했다.

여중생범대위에 따르면 11월 현재까지 김종일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3명의 여중생범대위 간부가 구속됐다. 불구속 입건되거나 수배중인 간부는 8명, 출두 요구서가 발부된 사람은 22명에 이른다.

채 사무국장은 경찰이 씌운 혐의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경찰의 주장대로 미신고 불법집회였다면 지난 해 12월∼올해 2월까지 촛불집회에 참여한 수십만의 시민도 '범법자'이고 경찰은 그간 직무유기를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채 사무국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는 계속된다고 말했다. 채 사무국장은 "지난 해 말 올해를 '자주 평화의 해'로 정하고 마무리했듯 올해도 1년을 돌아보고 2004년을 조망하는 송년 촛불집회를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변하지 않은 현실, 우리는 그래서 촛불을 든다"

익숙한 얼굴 신영철·한얼 부자도 눈에 띄었다. 신씨 부자는 지난 해 12월 7일부터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108일째 되는 날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광화문을 찾았다. 신씨 부자는 그렇게 매일 집이 있는 남양주시에서 서울의 광화문까지 찾아와 집회에 참석했다.

이날 연단에 오른 한얼(10·진건초 3)군은 "미선·효순 누나를 죽인 오만한 미국의 압력으로 우리 정부는 꼼짝 못하고 있다"며 "그러나 그런 미국의 요구에 우리 정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파병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얼군은 "현 정부가 참여정부라고 하는데 전쟁 참여정부인 것이냐. 국민이 참여하는 정부가 돼야 한다"는 '명연설'로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연단 위의 한얼군을 바라보던 아버지 신영철(45)씨는 "서글픈 마음이 앞선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신씨는 "1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었음에도 오늘은 쓸쓸한 기분"이라며 "우리 민족은 냄비가 아니라 뚝배기라고 외치던 시민들의 뇌리에서 미선·효순 사건이 너무 쉽게 잊혀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씨는 촛불은 미래를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 신씨는 "지난 해 미 대사관을 촛불로 둘러쌌던 감동을 잊지 못한다"며 "촛불의 힘이 더욱 응집력을 발휘해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집회 장소 한 편에서 사진 촬영하는 4명의 남녀가 보였다. 이들 중 3명은 모두 지난 해 11월 30일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이었다. 지난 해 대구에서 열린 첫 번째 촛불집회에 참여했었다는 김세영(29)·이인찬(30)·이은영(29)씨는 "우연히 '1주년 기념 촛불집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참여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인찬씨는 지난 해 촛불집회가 대학 졸업 후 무관심해지기 쉬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였다고 평가했다. 이씨는 "오랜만에 집회에서 만난 대학 선·후배와 옛날 이야기를 하고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을 나누는 결의의 장이 되기도 했다"며 "1년 동안 촛불의 힘이 좀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쉽다"고 안타까워했다.

5만여명이 촛불을 들었던 지난 해 12월 7일 촛불집회에 참여했었다는 허준규(27)씨는 "조직된 군중이 아닌 온라인 상에서의 생각이 몇만의 실천으로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지난 해를 보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였다"고 떠올렸다.

이들이 아직도 잊지 않고 촛불을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원강사로 일한다는 이은영씨는 단호하게 답했다. "변한 것이 없으니까요."

이날 오래간만에 연단에 선 한상렬(여중생 범대위 상임공동대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적은 수가 모였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이미 불붙었다. 그리고 다시 자주·평화의 촛불을 들 것이다. 그러므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1주년 촛불집회에서 만난 시민들의 말 속에는 '촛불의 미래'가 있었다. 변한 것이 없어 촛불은 꺼지지 않았고, 변하리라는 희망에 촛불은 계속 밝혀지리라는 의지, 바로 이것이 해답이었다.

"촛불집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미니인터뷰] 학원강사에서 평화운동가로...'촛불집회 첫 제안자' 앙마

▲ 지난 28일 '파병반대 선언 강철민 이병'이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기 직전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열린 환송 기자회견에서 지지 발언을 하고 있는 김기보씨.

'촛불시위'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앙마'(본명 김기보)다. 앙마 김기보씨는 지난 해 11월 <인터넷 한겨레>의 토론방에 "광화문을 평화의 촛불로 밝히자"는 호소글을 올린 주인공이다.

지난 해 첫 촛불집회에서 그는 내내 울먹이며 이렇게 호소했다.

"다음 주에는 친구들, 부모님 손을 잡고 나오자. 혼자 나오지 말자. 광화문을 촛불로 가득 채우자."

1년이 지난 김씨는 현재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29일 오후 기자와 통화를 한 김씨의 목소리는 무척 지쳐있었다. 그는 "지난 일주일동안 군복무 중 파병반대 선언을 한 강철민 이병과 함께 보냈다"고 말했다. 일주일동안 강 이병의 농성장에서 '파병반대 촛불'을 들었다는 그는 촛불집회 1주년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고 싶다"며 답을 피했다.

김씨는 지난 해 빚어진 여중생범대위와의 갈등, '자작 기사 논란' 등으로 본의가 가려진 채 언론의 뭇매를 맞았던 사건 등으로 상처를 입은 듯 했다.

김씨는 "일주일동안 강 이병을 지지하는 파병반대 촛불을 들면서 그간 입었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다"며 "촛불집회 1주년에 대해 너무 할 말이 많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씨는 촛불집회가 분명 인생의 전환점이었노라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부터 평화운동과 학원 강사라는 본업을 병행하다가 지난 8월부터는 본업을 버리고 본격적인 평화·파병반대 운동에 나서고 있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활동을 하면서 '강철민 이병 파병반대 선언' 관련 대 언론 실무를 맡고 있다.

김씨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현재하고 있는 평화운동을 계속하고 강 이병이 추후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우리 사회에 더욱 '톨레랑스'(용인) 정신이 널리 퍼지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관련
기사
[2002년 11월30일] 1년 전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