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이곳 남한산성과 인연이 깊다. 인조 2년(1624), 원래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던 것을 돌로 다시 쌓는 대대적 개수공사를 시작, 인조 4년(1626년)에 완공하고 이어 산성 내에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을 차례로 지었다.
10년 만인 인조14년(1636년)에 병자호란을 당해 피신을 오지만 결국 치욕적인 삼궤구고두의 예(아홉번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는 항복의식)를 치르며 항복하고 만다. 유사시를 대비해 대대적인 개수를 시작한 것도 인조였고, 예상했던 비상한 상황을 맞아 실제 피난을 왔던 것도 모두 인조 자신이었으나 바람과는 달리 남한산성이 그리 든든한 방벽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인조는 우리 역사 오천년을 통틀어 적국의 왕에게 직접 항복의 예를 행해야 했던 몇 안되는 극소수의 군왕 중 한 명이다. 남한산성은 이렇듯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성 안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역시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샘도 만들었으며 광주읍의 행정치소도 성안으로 옮겨왔다.
그만큼 중요시했다는 증거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 시행한 기동훈련에는 무려 1만27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한다.(인조17년 1639년) 그러나 그러면 무엇하랴! 적의 침략에 대해 단 50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다음인 것을.
산성의 남문. 원래 이름은 지화문(至和門)이다. 성벽의 안전을 위해 위로 올라 갈수록 점점 안으로 좁아지게 만들었다. 성벽위 여장(女墻)에는 한 개의 타구마다 3개씩의 총안(銃眼)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수원화성과 달리 모두 가까운 곳을 겨냥하는 근총안이다. 산성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멀리 내다 볼 필요가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리라.
암문(暗門)은 적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곳에 설치한 비밀 통로이다. 병기, 식량 등의 물자를 운반하고 구원요청을 하거나 원병을 받아들이는 등의 용도이다.
일명 서장대로 불리기도 하는 수어장대(守禦將臺). 산성에서 가장 높은 일장산 정상에 세워져 있다. 원래 단층이었던 것을 영조가 2층으로 짓게 했다. 바깥쪽의 편액이 수어장대, 안쪽이 무망루(無忘樓)이다.
무망루란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 효종이 볼모로 잡혀가 겪은 8년간의 고통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영조와 정조는 여주의 효종릉을 참배하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이곳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며 잊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를 되새겼다고 한다.
씁쓸한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채,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기며 남한산성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