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운주사 옹기
ⓒ 이종원
힘겨운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초들의 애환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것 중에 옹기 만한 것이 또 있을까?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도 항아리에서 퍼온 동치미 국물 한 그릇이면 뭉쳤던 응어리가 풀렸고, 콩쥐를 난감하게 만든 것도 깨진 독이고 보면 옹기는 늘 민초들과 늘 함께 살아 온 것임이 분명하다.

청자와 백자가 우아한 귀족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면 옹기는 미련하지만 우직한 돌쇠 모양새를 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옹기는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려준다. 순수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옹기를 어루만지면 어머님 품안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쓰다듬으면 진흙이 묻어날 것 같은 솔직함 때문에 나는 우리네 옹기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못생긴 옹기들이지만 함께 모여 있으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따사로운 가을볕을 쬐고 있는 간장독, 된장독, 고추장독은 보기만 해도 음악이 들려온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볼품없던 것들이 모여 조화된 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옹기종기'란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조선 천주교가 민간인들에게 깊이 파고 든 것도 옹기쟁이 덕이 크다. 박해를 피해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옹기를 구워가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가끔 주님이 보고 싶으면 흙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벽에 걸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신앙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의 손에는 흙으로 만든 묵주가 늘 걸려 있었고 품안에서 십자고상이 발견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득 사연을 담았던 옹기들을 이제는 보기가 쉽지 않다. 옹기촌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프라스틱 용기와 냉장고의 출현으로 잊혀져 간 퇴물이 전락한 것이다.

▲ 미력옹기 전시장
ⓒ 이종원
그러나 전남 보성의 미력옹기는 우리 전통의 옹기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이학수(옹기전수자)씨는 중요무형문화재 96호 옹기장 보유자였던 선친(이옥동. 94년 5월 작고)의 대를 이어 9대째 옛 모양, 옛 방식의 살아 숨쉬는 전통옹기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가 옹기를 굽는 것을 무척이나 반대하셨습니다. 천대받는 옹기장이 일은 당신 대에서 끝나기를 바라셨던 거지요.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나 봅니다. 대학시절인 76년 여름 대가 끊기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바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 왔습니다. "

그 때만 해도 옹기로 밥을 먹고살기는 힘에 부쳤던 시기였단다. 아버지는 한달 가까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화가 났지만 아들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마지못해 아버지는 옹기 전수를 허락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학수씨께 고마움을 느낀다.

만약 그때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300년 전통의 미력옹기는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라고 특별한 대우는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혹독하게 다그쳤으며 결국 온갖 설움을 이기고 아버지의 기술을 이어 받은 것이다.

옹기를 구워서 집안을 꾸려나갈 수 없자 보성에서 안경점까지 차렸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다행히 90년대 초반부터 건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미력옹기는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서울 경복궁안 전통공예관, 인사동 통인가게 등 서울을 비롯해 지방 곳곳에서 그의 옹기는 팔려 나간다.

이것은 바로 이학수씨가 옛 문헌을 뒤적여 전통옹기 제작방법을 연구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도자기 이론 수업을 받는 등 쉬지 않고 노력해온 결실인 것이다. 91, 92년 덕수궁과 잠실롯데백화점에서 열린 옹기문화전에 출품,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대한민국 전수공예 미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학수씨의 아내 이화영씨도 옹기제작 기능전수자다. 이화영씨는 조소과 출신의 도예가로 부부가 함께 옹기를 굽는다. 350년 된 가업이 계속됐으면 하는 것이 이들 부부의 소망이다. 숨쉬는 옹기, 과학문명도 잡을 수 없는 선조들의 슬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란다. 다행히 막내 이레군이 옹기제작에 관심이 커 10대째 대를 이을 것 같다고 한다.

▲ 오로지 점토 3개만으로 옹기를 만든다. 옹기의 생명은 질 좋은 흙이다. 진흙에 물을 주어가며 수차례 메로 두드리고, 께끼로 얇게 썰면서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
ⓒ 이종원
▲ 그렇게 정제된 흙을 판장질로 넓적하게 만들어 물레에 올려 밑판과 그릇벽에 붙여 기본형을 만든다. 미력옹기는 쳇바퀴타레기법으로 만드는데, 이 기법은 판장을 한장씩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남도고유의 기법이다.
ⓒ 이종원
▲ 흙을 판자모양처럼 넓게 펴고 물레 위에 밑판과 그릇판을 붙여 그릇의 행태를 잡고 배를 부르게 만든다
ⓒ 이종원
▲ 그 위에 또 흙을 붙여 나간다.
ⓒ 이종원
▲ 발로 물레를 돌리면서 모양을 만들고 두께를 조절한다.
ⓒ 이종원
▲ 물을 묻힌 물가죽으로 주둥이 모양을 잡으면 옹기의 형태가 완성된다.
ⓒ 이종원
▲ 가마
ⓒ 이종원
이런 옹기는 4일 동안 그늘에서 말린다. 그리고 나무와 풀을 태운 부염토가 혼합된 고운 흙으로 만든 '잿물'유약을 바른다. 일반 옹기는 인체에 해로운 '광명단'이란 유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릇이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한다.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실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잿물을 발라 구운 전통옹기는 옹기안과 밖의 공기가 순환해 물과 음식을 오래 보존 할 수 있고, 잘 썩지 않게 한다'라고 발표하면서 미력옹기의 신비를 밝혀주고 있다. '땀을 바깥으로 공기는 안쪽으로…'라는 신발CF처럼 숨쉴 수 있는 그릇을 만들 수 있는 비결은 잿물에 있는 셈이다.

미세한 구멍 때문에 고추장이나 간장을 담가 해를 거듭해 저장해도 변질되거나 썩지 않으며 음식물의 맛과 신선도를 오래 유지시켜 주고, 오염물질을 없애 주는 자연 자정역할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300도 불을 일주일간 지피기 위해 소나무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가마는 나지막한 언덕 구릉 위에 경사 25도로 길게 뉘여 있다. 이는 불길이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물기가 다 마른 옹기가 한 가마분(500∼1천 개)이 돼야 가마에 불을 지핀다고 한다. 불 때는 작업이야말로 미력옹기제작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피를 말리는 힘든 작업이다. 아주 낮은 온도의 피움불을 사흘간 피워서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다음 본격적인 돋김불을 지핀다.

이때부터 가마 속 온도가 섭씨 1300도 정도가 될 때까지 일주일간 밤낮으로 불을 때야 한다. 공들여 만든 옹기도 불이 너무 세면 주저 앉아버리고 만다. 잘해도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은 반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제작의 어려움 때문인지 미력옹기는 상품화될 수 없는 것일지라도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깨부수지는 못한다. 대신에 겨울철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청죽 숲 속에 감춰 놓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못생긴 옹기는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란다.

▲ 미력 전통옹기
ⓒ 이종원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누구나 한번은 찰흙을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그저 대충 만들어 구우면 옹기가 나오는 줄 알았다. 이번에 장인이 옹기 하나를 만드는 과정을 목격했다. 진흙을 주물기 시작하면서 1시간동안이나 꼬박 정신을 집중해야 옹기 하나가 탄생하게 된다. 손의 움직임은 가히 신기에 가까울 따름이다.

"제 기술은 여기까지랍니다. 이제부터는 불길이 옹기를 만드는 셈이지요. "

이학수씨의 현명한 결단으로 300년의 가업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300년간 옹기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멸시와 천대를 이겨냈기에 오늘날 미력옹기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미력 옹기엔 슬픔과 한이 묻어있다.

350년간 흙만 만졌던 옹기장이 집안의 내력을 보면서 착잡함과 감동이 교차된다. 그리고 10대 장인인 막내 이레군에게 시선이 간다. 흙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항아리가 수천 년을 이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 미력옹기 가는 길

서울-서광주 IC-화순-29번 국도-미력면을 지나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다.
문의: 061-853-8090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