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은 여성스러운 땅이다. 이는 사방을 둘러 싼 부드러운 황토와,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서로 잘 분간되지 않는 낮은 구릉과 고분들 때문인데, 그 인상이 성숙한 여인의 봉긋한 젖가슴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따사로운 품 같기도 하다. 잘 익은 홍시빛의 황토길 위에서 여행자는 그래서 편안하고 포근하다.
지금은 매립되어 옛 물길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애초 그 곳에는 강물과 바다가 몸을 섞어 흐르고, 온갖 생명을 길러내는 뻘밭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구릉을 등지고 앉아 추운 바람을 막고, 사나운 짐승을 피했으며 풍요로운 강에서 고기를 잡아 올리고 기름진 충적토에서 곡식을 거뒀다. 이렇게 생명이 자궁에서 잉태되듯 삶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또한 그곳은 고단한 유목의 삶을 끝낸 이들이 터를 잡은 축복의 땅이었을 터이다.
반남으로 가는 길은 태초의 삶을 좇아 역사의 자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다. 옹관은 생명의 시작과 끝을 생각하게 한다. 남녀의 성적 결합을 암시하는 듯한 독특한 형태는, 죽음이라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목숨이 권력과 삶의 영원을 기약하면서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그것에 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 거대한 무덤 속에 가두어 소유하려한 시간은 어김없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 오늘 우리의 몸에 박힌다. 그 화살의 궤적을 따라 찾아간 무덤 속에 옹관이 있다.
나주, 그리고 반남은 ‘고분의 땅’으로 불려도 될 만큼 수십 기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흔히들 고분을 말하면 공주나 부여, 경주를 떠올리기 쉬우나 이곳에 와 본 이들은 이처럼 크고도 많은 고분이 있다는 것과, 여기에서 출토된 거대한 옹관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반도의 서남해안을 따라 발견되는 매장방식이기는 하지만, 3세기~6세기 나주지역의 고대 세력은 학계에서 ‘옹관고분사회’로 지칭할 만큼 방대한 규모로 오랜 시기에 걸쳐 옹관고분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는 옹관과 함께 금동관도 나왔는데 무녕왕릉 이전 시기에 백제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것일 만큼, 옛 반남 지역의 고대세력이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자 고도의 문화수준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곳의 발굴은 일제 시기 일인 학자들이 주도하였는데 한반도 남부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던 그들은 발굴 유물의 수준이 시대적으로 너무 뛰어나, 도리어 반도의 세력이 일본을 지배했다는 해석도 가능하자 ‘무덤의 주인은 왜인(倭人)일 것이다’라는 간단한 보고서만 낸 뒤 서둘러 발굴 조사를 끝내 버렸다고 전한다.
또 현재의 반남면사무소가 소재한 자미산의 기슭을 따라 축성된 자미산성은 동시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계단식 토성의 양식으로 쌓아졌는데, 이는 영산강 유역 및 서남해안을 지배했던 고대사회의 정치세력이 동일한 토성양식과 옹관고분으로 묶어지는 일정한 정치적,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한 나라로 묶여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도 되지만, 아쉽게도 기존의 '마한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도 학계에서 정식화되지 못한 채 6세기 백제에 병탄 되기 이전까지를 두고 ‘영산강유역 고대사회’ 내지는 ‘옹관고분사회’로 부르고 있다.
이외에도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3호분)은 이른바 ‘아파트형 고분’으로, 반남 고분군과 같은 시기의 옹관 양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의 무덤 양식들이 하나의 고분 속에 4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특이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2001년 나주시 오량동에서는 그 동안 옹관가마는 남아 있을 수 없다고 했던 기존의 정설을 깨고 1500여년 된 가마터가 발굴되었는데, 10만여평이 넘는 땅에 널려진 무수한 옹관 파편들에서 대규모의 옹관 생산이 행해졌을 당시의 융성한 상황을 짐작할 만 하다.
가마터 앞에서 만난 오량동의 임학성(53)씨.
“일제 때 보를 막아서 논을 맹글었다고 헌디 우리 어려서만 해도 농사 안 되았어라. 옛날에는 배도 댕기고 고기잡고 그랬제. 제대로 농사 진 지 얼마 안 되라.”
일제 말엽에도 밀물 때면 가마터 바로 앞까지 짠물이 섞인 영산강물이 흘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간척되어 너른 들판이 되어 있다. 반남고분군, 복암리 고분군 등의 ‘옹관고분군사회’는 바로 이런 영산강의 수운과 나주평야의 농업생산력에 기반한 사회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