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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강에서 바라본 동해바다와 만물상 일부. 금강산은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이루어져있고 해금강은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해금강에서 바라본 동해바다와 만물상 일부. 금강산은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이루어져있고 해금강은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 박신용철
인제를 거쳐 원통에 이르면 길녘에는 황태덕장이 수시로 눈에 띈다. 아침나절 서울을 출발한 금강산행 버스가 원통에 이르면 점심나절, 원통 명물인 황태해장국에 언 몸과 피곤함을 풀어놓고 버스에 오르면 DMZ 동부전선 최전방인 고성에 가까워진다.

고성에 가까워질수록 가장 눈에 많이 보이는 것은 도로 옆에 설치된 대전차 방어막과 군부대 표시판 그리고 철책이다. 고성에 도착하면 철책이 쳐진 도로 옆에 청록색 동해바다가 눈쌓인 백사장과 함께 넘실거리고 승객들은 환호성을 자아낸다. 남측사람들은 금강산의 절경을 구경하러 가는 들뜬 마음 때문인지 철책으로 상징되는 남북 긴장관계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DMZ에 가까워질수록 군 시설들이 산에 있어야할 나무들을 대신하고 있다. 화진포는 청정도가 높고 염도가 낮아 겨울철새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해방 이후에는 김일성 별장이 있었고 한국전쟁 후에는 이승만 별장 등이 들어설 정도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DMZ 최북단 통일관광대인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하기 전 금강산 호텔에서 신분증과 금강산 관광증으로 교환한다. 노년에 금강산 나들이 길에 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행 중 붉은색 점퍼를 입은 사람에게 "북에 가서 환영받겠구만", "정형근, 김용갑에게 걸리면 큰일나"라는 등의 색깔론(?)을 농으로 주고받았다.

통일전망대에 가까워지자 '해금강' , '금강산' , '민통선' , '통일' 등의 상호를 붙인 상가들이 길옆에 줄이어 들어서 이 지역이 민통선지역과 비무장지대 인접지역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금강산 육로 길인 중무장지대 미묘한 긴장감 흘러

4시간 가량을 달린 금강산행 버스는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하고 금강산으로 향하는 남측 사람들은 '임시남북교류협력연락사무소'에서 출국심사를 마친 뒤 버스를 갈아타고 남측 비무장지대의 문이 열리면 길옆에 '지뢰지대'의 호위를 받으며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본격적인 금강산길 나들이를 떠난다.

지난 1월 23일~25일 금강산에서는 분단 55년만에 평화통일 기원 연날리기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지난 1월 23일~25일 금강산에서는 분단 55년만에 평화통일 기원 연날리기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 박신용철
삼중의 남측 철책을 옆에 끼고 잠시 달리다보면 '금강통문(제8문)'의 문이 열리고 중무장지대인 'DMZ'를 통과한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로 155마일 휴전선을 긋고 남과 북 각각 2㎞를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했지만 현재는 남과 북 모두 상대방의 군사시설 설치를 이유로 무장을 강화해 '중무장지대'로 변모시킨 지 오래다.

흔히들 휴전선 하면 한 줄로 연결된 '선(線)'을 생각하지만 휴전선은 선이 아니라 1292개 황색표지판이 300m에서 500m 가량으로 늘어선 것을 말하며 정전협정 직접 서명자인 북측과 중국이 596개의 표지를 관리하고 유엔측이 696개를 관리하기로 했으나 현재는 관리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곳에 북측 철책문이 열리고 길 옆에는 인민군 초병들이 남측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무표정하고 굳은 자세로 도열해 서있다(사실 군사지역인 관계로 남측 사람들의 사진촬영을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다).

북측으로 들어서면 금강산 임시도로 좌우로 바위산과 민둥산만 보일 뿐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적 폭격에 의해 아직도 산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황야를 연상케 했다.

북측에 들어섰다고 곧바로 금강산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민군들이 직접 차량에 올라 인원수와 이상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인민군 경무관(남측의 중위 계급에 해당)이 직접 버스에 승차하면 남측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돈다. 그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찬 겨울 칼바람 불 듯 차내가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다.

인민군 경무관이 전 차량을 확인한 뒤 인민군 소좌(남측 중령계급에 해당)에게 보고한 뒤에야 북측 차량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금강산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신고된 인원수가 맞지 않으면 다시 남측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일까?

바짝 긴장했던 남측 사람들은 버스가 서서히 이동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고 자연호수인 '감호'를 거치게 된다. '감호'는 양양에서 금강산 자락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동해북부선의 중간 기착지인 초두역이 있던 자리로 휴전선 155마일 중 유일하게 지뢰가 없는 지역이다. 1972년 남북체육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남북이 지뢰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1638m)'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금강산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이듯 비로봉도 불교의 비로자나불(온 우주에 하나뿐인 참된 부처, 일명 대일여래). 아마타여래, 석가모니불 중 비로자나불에서 명칭이 유래됐다. 그렇다면 금강산 봉우리는 일만이천개일까?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고성항에 위치한 '호텔 해금강'에서 바라본 외금강 일부. 군사기지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뿌연 창문을 통해 바라볼 수 있지만 저멀리 솟아 있는 천불산 촛대바위(639m)가 돗보인다.
고성항에 위치한 '호텔 해금강'에서 바라본 외금강 일부. 군사기지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뿌연 창문을 통해 바라볼 수 있지만 저멀리 솟아 있는 천불산 촛대바위(639m)가 돗보인다. ⓒ 박신용철
지금까지 정확하게 세어본 적은 없지만 대략, 3600여 봉우리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금강산을 일만이천봉이라고 셈했던 것일까? 화엄경에 따르면 담무갈 보살(法起菩薩)이 1만2천명의 보살을 데리고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를 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금강산 봉우리의 모양이 수도를 하던 1만2천명 보살의 각기 다른 모습을 닮았다하여 '일만이천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서울에서 출발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는 지리한 일정과 비무장지대와 인민군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긴장 상황을 겪고 나서야 북측 최남단 해군기지인 고성항에 위치한 '호텔 해금강'에 여장을 푸는 것으로 금강산 육로여행길은 갈무리된다.

고성항에 가까워지면 북한 지역 마을들을 볼 수 있는데 북측 마을은 70년대 개량식 마을을 떠오르게 하고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더욱 허름해 보인다. 난방은 아파트라고 해도 나무를 주 난방재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중 '온정리'는 조선조 말 외금강으로 금강산 관광을 떠날 때 들르던 온정리역이 있던 마을로 역사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되었고 지금은 북측 마을 청년들이 힘을 모아 지은 '온정리청년회관'이 들어서 있다. 냇가에는 외줄 썰매를 타는 어린아이들도 보였고 길가에는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북측 동포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경직된 북측 태도에 '불만'…돌아오는 길 '민족 동질감 느껴'

금강산 나들이에 나선 남측 사람들은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5년이나 되었는데 인민군 등 북측 사람들의 경직된 태도를 비판하면서 "내 돈 내고 오는 것인데 다시는 오고 싶지 않더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차라리 동남아 관광을 권하겠다"는 등의 냉소적인 발언이 간혹 터지기도 했고 일부 제도권 언론 기자들은 북한 퍼주기론을 거론하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일부는 금강산에 오기 위해 남측에서 통관절차를 밟고 1시간 30분여 시간 후 북측에 도착해 또다시 입국절차를 밟아야 하는 번거로움에 불만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렇게 금강산의 밤은 깊어가고….

다시 남측으로 돌아오는 날,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북측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딘가 변해 있었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에서 왔다는 서아무개(64)씨는 "처음엔 북측이 남의 나라 같더니만 돌아가는 날 보니 남 같지 않다. 처음엔 북측 사람들이 무서웠는데 이젠 안쓰럽다"고 2박3일간의 일정을 회상하기도 했다.

평양모란봉예술단이 남측 관광객들에게 공연을 마치고 '동포여러분 다시 만납시다'는 인사를 하고 있다.
평양모란봉예술단이 남측 관광객들에게 공연을 마치고 '동포여러분 다시 만납시다'는 인사를 하고 있다. ⓒ 박신용철
금강산 버스가 일정을 마치고 남측 철책 안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말투와 행동에서 긴장감을 풀게 된다. 아직은 북측과의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차이를 해소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간증해 주는 듯했다.

지난 반세기가 넘게 단절되고 군사적 대치상황 속에서 살아온 남북이 금강산관광을 매개로 조금씩 민족동질성을 회복해갈 수 있다면 막대한 통일비용을 들였음에도 아직도 사회갈등의 앙금이 남아있는 흡수통일을 했던 독일 사례와는 다르게 6·15남북공동선언정신에 맞는 자주적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기초를 닦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시민의 신문(www.ngotimes.net)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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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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