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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대결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외에서 북한이 리비아식 해법을 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리비아의 가다피 정권이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는데 있어서, 리비아 내부 사정과 미국-영국-리비아 사이의 3자 협상 과정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상하원 합동 연설을 통해 "지난달(12월) 리비아 지도자는 자발적으로 핵무기를 위한 우라늄 농축 프로젝트를 포함한 그 정권의 모든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들을 공개하고 폐기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북한도 리비아의 모델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6자회담 한국측 수석대표인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 역시 지난 23일 워싱턴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리비아식 해법'을 적시한 바 있다. 이 차관보가 "우라늄 프로그램은 북한이 신뢰를 갖고 리비아식으로 스스로 신고하지 않고서는 찾기 힘들다"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반해 북한은 리비아식 해법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임을 내비친 바 있다. 1월 9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이 (이라크와 리비아 등) 일부 중동 국가에서 연출한 사건을 광고하면서 그 효과가 조선반도에서 재현되지 않겠는가 하는 환각에 빠져 있다"며, "우리는 과거에나 지금에나 그 누구에게서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남한과 미국 정부는 리비아식 해법으로 북핵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반면에,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있는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비아식 해법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이를 거부하는 쪽은 오히려 부시 행정부라고 할 수 있다.
리비아는 왜 WMD를 포기했는가?
우선 왜 부시 행정부가 리비아식 해법을 강조하는지 그 배경과 의도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량살상무기 위협 제거를 명분으로 삼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시키고, 리비아 모델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기초로 북한, 이란 등 다른 나라들에 대한 외교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플린트 레베레트는 "리비아의 WMD 포기를 이라크 전쟁과 연결시키는 것은 리비아 모델의 진정한 교훈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부시 행정부 초기에 국무부 정책기획국에서 일하면서 미국과 리비아의 협상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레베레트는 1월 23일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을 통해, "리비아의 최근 행동의 뿌리는 이라크 전쟁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고 강조했다. 즉,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서 '힘'을 보여줌으로써 리비아의 양보를 얻어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리비아의 대미정책의 변화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훨씬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리비아는 클린턴 행정부 2기 때인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이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는 가다피 정권이 1988년 발생한 팬암 103기 폭파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관계 개선을 하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중재에 나서 리비아는 팬암기 테러 사건과 연루된 2명의 정보원을 네덜란드 법정에 인도했고, 미국은 유엔의 리비아 제재 해제 방침에 동의하기로 함으로써 돌파구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미국-리비아 사이의 화해 분위기를 넘겨받은 부시 행정부는 추가적인 조건으로 팬암기 테러 사건의 희생자에 대한 리비아 정부의 보상을 제시했고, 이를 리비아 정부가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동의하에 유엔의 리비아 제재가 작년 여름 해제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나가 리비아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WMD를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절실했던 리비아로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전'인 2003년 3월 초, 미국·영국과 비밀협상에 들어갔고, 미국으로부터 WMD를 포기하면 경제제재 해제를 비롯한 관계 개선을 약속받은 리비아는 작년 12월 19일 WMD 포기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 초기에 리비아와의 협상에 참여했던 레베레트는 리비아 모델의 성공 요인은 테러조직과의 단절과 WMD 포기 대가를 리비아에게 명확히 제시하면서 협상에 임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불행하게도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접근 방식을 다른 깡패국가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처럼 부시 행정부가 리비아식 해법을 다른 나라에게 적용하지 않은 이유는 "깡패국가들에게는 어떠한 당근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강경파들이 미국 외교를 주도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리비아와의 협상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상대적인' 온건파가 주도했다. 이는 강경파의 입김이 강한 이라크, 이란, 시리아, 그리고 북한에는 리비아 모델이 적용되기 어려웠던 근본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비확산 문제 전문가인 다일 킴벨 '군축연합(Arms Control Association)' 소장 역시 리비아의 성공 사례는 부시 행정부가 강조하는 것처럼 '선제공격 전략'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예방외교와 비확산 조약 및 사찰, 그리고 경제제재와 유인책 제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군축연합이 발행하는 군축문제 전문잡지인 '군축 투데이(Arms Control Today)' 1/2월호에서 킴벨 소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지속되어온 미국-리비아 사이의 협상에 따른 '신뢰'를 바탕으로, 리비아는 미국으로부터의 관계 개선을 약속받고 WMD를 포기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 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리비아 전문가인 리사 앤더슨은 리비아의 WMD 포기 배경의 중대한 요인으로 리비아 내부 사정을 들기도 했다. 컬럼비아대 국제공공정책 스쿨의 학장을 맡고 있는 앤더슨은 미국외교협회(CFR)과 가진 인터뷰에서 "가다피 정권은 국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으로부터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며, 9.11 테러 직후 이슬람 테러조직과 관련된 정보를 부시 행정부에게 넘겨주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해왔다고 설명했다.
이 두 나라는 이슬람 테러조직을 '공동의 적'으로 삼으면서, 가디피 정권은 국내의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부시 행정부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공동의 이해를 추구했던 것이다.
부시 행정부, 리비아식 해법 꺼려해
위와 같은 내용을 종합할 때, 리비아식 해법을 북한에게도 적용하기를 꺼려해 온 쪽은 부시 행정부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상반기까지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 정책기획국에서 일했던 레베레트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다.
우선 부시 행정부는 리비아와의 '직접 협상'을 통해 리비아의 WMD 포기와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를 맞바꾸는 방식으로 협상을 한 반면에, 북한에 대해서는 '직접 협상'도 거부해왔고 북한의 핵포기 유인책을 확실히 제시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로 미국과 리비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협상을 진행하면서 서로 합의한 사항들을 대체로 이행함으로써 상호간에 신뢰를 쌓아온 반면에,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 이행에 대단히 지지부진한 태도로 일관했고,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북한의 불신을 배가시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부시 행정부는 전임 정부의 리비아와의 협상 내용을 '계승'했지만, 북한과의 협상 내용은 완전히 무시했다. 클린턴 행정부 막바지 때 북미간에는, 미사일 문제 해결을 포함한 중요 현안에 대해 합의점에 도달하면서 관계 정상화 및 평화체제 구축 의사까지 담은 '공동코뮤니케'를 채택한 바 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부시 행정부 출범 직후 파월 국무장관은 "유망한 요소"가 있다며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할 의사를 표명했으나, 백악관은 파월 장관을 강력하게 질책하면서 대북포용정책을 철회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이처럼 북한과 리비아 사이에 차별적인 정책을 적용한 것은 근본적으로 북한과의 협상보다는 북한 위협을 빌미로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등 군사적 기득권을 강화하고, 적절한 시점에 북한을 제거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리비아식 해법, 좋은 대안될 수 있어"
단순 적용하기는 곤란하겠지만, 미국-리비아의 협상 모델은 북핵 문제 해결에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대외 정책 전문가인 서재정 코넬대 정치학과 교수는 "리비아가 미국의 힘의 외교에 백기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의 내용을 보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협상과 타협에 의한 해결"이라며, 북핵 문제 해결에도 리비아 방식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무현 정부는 바로 이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즉, 부시 행정부가 리비아의 WMD 포기라는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요인은 '힘의 외교'와 함께, 리비아와의 직접 협상을 통해 반대급부를 명확히 제시함으로써 리비아의 양보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와 같은 유력 언론을 포함해 미국의 상당수 전문가들도 부시 행정부에게 권고하고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이미 양자대화가 아닌 6자회담 방식이 채택되었고, 제네바 합의를 대체할 새로운 포괄 합의문이 고려되고 있는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대외정책의 최대 성과물처럼 내세우고 있는 리비아식 모델을 북한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내용은 모두 부시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일방적인' WMD 포기가 리비아의 모델인 것처럼 잘못 해석해 북한의 핵포기를 촉구할 것이 아니라, 비밀접촉, 확실한 유인책 제시, 합의 사항 이행 등으로 구성된 실질적인 리비아 모델을 북미 양측이 채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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