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결혼과 이혼을 둘러싼 동상이몽(同床異夢)이 활발히 생산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만큼이나 고루한 단어도 드물 것이다. '또하나의문화(또문)' 열일곱번째 동인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새로 쓰는 가족이야기>가 가족을 화두로 삼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눈에 띄는 일이다.
저자인 또문 동인들 역시 그 사실-"이제 사람들은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피곤해 한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똑똑한 여자들은 커리어와 애정 게임에 몰두하면서 아이를 낳지 않으며, 아이를 기를 준비가 되지않은 이들은 아이를 낳고 있다"면서 "더 이상 '정상가족'은 없다"고 선언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족을 끄집어내는 것은 가족이 습관과 태도를 대물림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며, '개인화'된 딸과 아들들은 지난 시대를 해체하고 홀가분하게 자기 삶을 새롭게 구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정녕 어렵고 힘들다면 안가겠다"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는 크게 50대와 20대 여성주의자로 구분할 수 있는 두 세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또문 동인들은 가족적 삶을 세 단계-자신이 태어난 가족,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드는 가족, 아이들이 독립해 새로운 보살핌의 관계가 형성되는 가족-로 나눈다.
두 번째 단계와 첫 번째 단계를 갓 마감하고 각각 '세번째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50대와 '집을 떠나는 사람들'인 20대의 고민은 한가지 물음에서 접점을 찾는다. 바로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남편과 사이좋게 살 것을 제 3의 프로젝트로 삼은 50대 동인은 "나이 들어서 사이좋게 지내는 법 제 1조는 새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라고 충고했다가 '사이좋게 해로하는 법' 같은 책은 "앞으로 십 년 이상 더 살아본 다음에 쓰는 게 양심적"일 것이라고 고백한다.
마을 곳곳에서 공동식탁이 차려지며 크고 작은 학예회들이 벌어지는 공동체를 꿈꾸는 다른 동인은 모계적 부족 만들기 프로젝트의 실현을 주장하는가 하면, "십년 정도 친구와 둘이서 독거를 함께 할" 계획을 짜둔 이도 있다.
50대 동인들이 남편과 계속 살 것인지, 다른 파트너를 찾을 것인지 숙고하는 동안 20대 동인들은 어떻게 집을 떠날 것인지, 어떻게 가족을 떠났는지 혹은 떠나고 있는지 털어놓는다.
동거연습을 하고 있는 20대 동인은 동거가 단순히 같이 살아보는 실험이 아니라 사람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는 연습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찾는 좋은 남자는 존재불가능임을 일찍이 알아챈 또 다른 동인은 성(城)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고-성에 출근하는 파출부도,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도, 성이 위치한 땅의 지형도 아닌- 천명한다.
또 어떤 이는 반드시 누구와 '함께' 살아야하는 것인지를 물으면서 "그 길이 정녕 어렵고 힘들다면 안가겠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잘 살 거야'
결과적으로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는 같은 물음에 대한 판이한 답들의 묶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답들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핏줄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주거공동체(domestic community)에 대한 모색을 담고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그 과정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꺼이 모험에 뛰어들며 '그래도 우리는 잘 살 거야'라고 외치는 '유목민'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들의 말처럼 "새로운 역사쓰기는 가장 친밀한 관계의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뒤이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책은 고민해 볼 만한 '거리'들을 적지 않게 던진다. 진지한 것은 좋으나 무거워질 필요는 없다. 그들이 했듯이 독자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수다를 풀어놓으면 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수다가 그러하듯 독자들의 수다 역시 무척 유쾌하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