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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버님은 붓글씨를 쓰십니다. 직업적으로 쓰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솜씨가 제 눈에는 예사 솜씨로 보이질 않습니다. 중학교 때 엉성하게 붓글씨를 쓴 제 솜씨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글씨이지요. 그런데 지난 번에 보니 아버님의 벼루가 조금 작았습니다. 나무 곽에 담긴 그 벼루도 그나마 아버님 것이 아니라 향교 소유라고 하는군요. 단지 아버님이 글 쓰는 일을 맡아서 하시다보니 집에 가져다 둔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님께 아주 멋지고, 뚜껑도 있고, 먹도 잘 갈리면서, 먹물도 잘 마르지 않는 그런 벼루를 선물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단계연이 좋은 벼루라고 하는데 검색을 해보니 그 가격이 몇 십만원에서 몇 백만원을 넘습니다. 이런 벼루를 사다드리면 아마 아버님은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예산 안에서 가격을 낮추거나 아니면 품목을 조금 줄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날을 잡아서 인사동엘 갔습니다. 작은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할아버지가 벼루를 팔고 계셨습니다. 이것저것 살펴 봐도 맘에 드는 게 없었습니다. 저는 아주 예쁜 벼루를 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러면서도 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구요.

그냥 나오다가 그만 실수로 옥으로 만들었다는 꽂이를 건드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그걸 샀는데, 그 할아버지 처음과 달리 마구마구 화를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살 것도 아니면서 왜 들어왔냐고 하면서요. 참 무서웠지만 또 슬퍼졌습니다. 생 돈이 나가는 것도 아까웠구요. 옥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조금 비쌌거든요.

다른 가게에 갔습니다. 서예와 관련한 모든 품목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습니다. 역시 한 가지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에 가야 제대로 된 물건을 살 수 있는 거 같습니다. 벼루도 아주 예쁘고, 물도 잘 마르지 않는 좋은 벼루였습니다. 먹과 서진, 그리고 붓도 한 자루 샀습니다.

이 물건을 담을 상자를 구입하고 싶었지만 돈이 여유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계속 상자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과일 파는 곳에서 딸기 상자를 하나 얻었습니다. 가게에서 벼루를 포장해 준 한지를 이용하면 될 거 같습니다. 우선 A4용지를 상자에 모두 싸 바르고 그 위에 한지를 다시 붙였습니다.

어설프지만 재활용해서 상자를 만들어 포장을 한 제 자신이 스스로 기특했습니다.

설에 가서 벼루와 먹, 서진을 담아서 드렸습니다. 그다지 기뻐하시지 않는 거 같아서 서운했는데 남편 말이 아버님이 웃으셨는데 그건 아주 기쁘실 때만 하는 웃음이라고 하는군요. 아버님은 감정 표현에 아주 절제를 하시나 봅니다.

설 연휴 기간 내내 아버님은 제가 부탁드린 신년사를 썼다 버리고, 썼다 버리고 하셨습니다. 뭘 그런 걸 써달라고 하느냐고까지 하셨습니다. 마치 쓰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지만 저희가 서울로 돌아오는 날 아버님은 아침 일찍 신년사를 써서 말아 놓으셨습니다. 내용은 단순합니다. ' 망, 근하신년운수대통 경덕 정형채'를 한자로 쓴 것입니다. 문구도 아마 어느 것을 쓸까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장사를 시작한 막내 아들 장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막내 며느리 공부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으셨을 것입니다. 남편과 저는 아버님께서 써 주신 신년사를 액자에 끼워 넣을 생각입니다. 아직은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 놓고 아침 저녁 드나들 때 그 신년사를 보고 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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