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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 '휠'의 대표이자 배우인 송정아씨가 몸을 던져 연습을 하고 있다
ⓒ 김진석
“그들의 자살이 이해가 돼?”
“취업 못 해 죽은 사람! 왜냐면 나도 14년 동안 취직을 못했으니깐. 정말 그때는 하루 종일 별의별 잡생각이 다 들어! 하지만 이제 겨우 19살짜리가 자살을 한 건 말도 안돼! 실연당했다고 죽는 것도 이해 안 돼. 난 아직 연애를 안 해 봤거든.”

17인의 아마추어 연극 배우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견주며 대본 분석이 한창이다. 겨울 한파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저 연극이 좋아 모인 아마추어 극단 ‘휠’ 의 열기가 효창동 한벗회관을 달구고 있다. ‘휠’ 은 연극을 하고자 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들 모두에게 열린 극단으로 중증장애인들이 타고 다니는 휠체어의 준말이다.

2001년 극단 대표 송정아(32·지체장애)씨가 인터넷 모임을 통해 발족한 휠은 올해로 네 돌을 맞았지만 공연 횟수는 아직 다섯 번에 불과하다. 2003년 2월 창단 공연 후 휠은 오는 25일부터 29일까지 대학로 봉산민속극장에서 '선택2004프로젝트!'로 첫 번째 정기공연을 갖는다.

▲ 이들이 연습하고 있는 연극은 '선택 2004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자살을 통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연극이다
ⓒ 김진석
'선택2004프로젝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복 받은(?) 자살자들의 사연을 담았다. 그들의 사연은 휠 단원들이 서로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얘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전문 연출가 한순희(31)씨를 통해 극본으로 탄생했다.

자급자족하는 건 극본만이 아니다. 후원사가 없는 휠은 모일 때마다 한 사람당 1000원씩 거둔 돈과 작년 창단공연의 수익금으로 지금껏 극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식사 또한 당번을 정해 손수 만들어 먹는다. 공연을 20여 일 앞둔 그들은 공연 한 달 전부터 매일 오후 1시에서 밤 10시까지 맹연습에 돌입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크고 정확하게 해! 늦게 해도 괜찮아!”
“귀는 두개고 얼굴이 쭈글쭈글 해.”

연출가 한순희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힘입어 한아름(23·지체)씨가 힘주어 천천히 대사를 읊는다. 비록 몇 마디 없는 단역이지만, 어린 시절 배우가 꿈이었던 한씨는 무대에 오른다는 설렘에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씨는 발음이 안 좋아 대사를 정확히 전달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휠을 통해 난생 처음으로 ‘사회 생활’을 경험했다며 연신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연극을 통해 사회 밖으로 나오기 전까진 사람 앞에만 가면 긴장되고 두려워서 말도 못했다”며 “연극도 좋지만 사람과 만나 함께 얘기하고 어울리는 게 가장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장애인들도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며 “예전의 자신처럼 집안에만 있던 다른 장애인들도 집밖으로 나와 사회 활동에 참여 할 수 있길 바란다” 고 감회를 밝혔다.

▲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엄마와 아들의 역할로 연습을 하고 있다
ⓒ 김진석
“앞을 보고 말해야지! 말부터 먼저하고, 그 다음에 휠체어를 움직여!”

비록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씨와 달리 한석준(23·지체장애)씨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한다. 그런 한씨에게 가장 어려운 건 다른 사람의 삶을 진짜로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 감정 연기라고 한다.

그는 사람이 연기를 하며 돌변하는 모습이 신기해 어릴 때부터 집에서 부모님을 상대로 연기 연습을 했다. 간혹 아픈 표정, 화장실 가고 싶은 표정을 연기해 부모님을 놀라게 하는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한씨는 “우리는 그저 몸이 조금 불편할 뿐인데, 세상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며 “비장애인들은 우리도 그들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감정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연기하면서 자신이 몰랐던 경험과 삶을 배운다”며 “장애인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다”고 전했다.

연습은 끝도 없이 계속 됐고 공연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단원들은 적잖이 긴장하는 눈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랫동안 몸에 밴 좋지 않은 습관들이 계속 튀어나오고 없었던 대사가 생기는가 하면 있었던 대사가 사라지는 등 번번이 연습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간혹 순간순간 예상치 못한 배우들의 돌출 행동과 대사로 터지는 폭소가 그나마 단원들에게 막간의 여유를 안겨줬다. 비록 아직 프로다운 면모는 갖추지 못해도 그들은 같이 안타까워하고 뒤에서 대사를 읊어주며 서로를 기다려주었다. 부정확한 발음,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하는 불편한 몸, 희미한 시각의 그들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더디지만 그들만의 연극을 천천히 만들어갔다.

ⓒ 김진석
극단 ‘휠’ 이 다른 극단과 차별되는 개성 중 하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연극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에 대해 잘 모르듯 장애인도 비장애인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 왜곡된 사회 인식으로 본의 아니게 서로 알 기회가 없던 그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서로를 알아가기도 한다.

우연히 친구 소개로 휠 활동을 시작한 박양수(20)씨는 “솔직히 예전엔 장애인들이 몸뿐 아니라 생각도 비장애인들에 비해 조금 부족한 줄로만 알았다”며 “이제서야 장애인들이 그저 몸이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털어놨다.

그 또한 연극을 통해 남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며, 평소 성격이 급해 말을 빨리 하는 좋지 않은 습관까지도 같이 고칠 수 있게 됐다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박씨는 “예전의 자신이 그랬듯 장애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먼저 왜곡된 시선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을 것”이라며 “서로를 알 수 있는 자연스런 기회가 사회적으로 많이 마련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여느 배우 못지않게 목이 터져라 열연하는 사람이 있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빈틈없이 적힌 대본을 들고 배우들에게 연기 시범을 보이느라 열성으로 지도하는 연출가 한순희(31·국악예고 연기교사)씨.

그는 “모두가 아마추어 배우이기에 기본적으로 백 번은 말해야 알아듣는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휠을 통해 문화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러 장애인들에게 평생 연극을 가르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전했다.

한씨는 “누구에게나 연극이라는 문화를 공유할 권리가 있다”며 “장애인이라고 해서 문화를 향유할 당연한 권리에서 소외당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휠 극단이 전문 프로 극단으로 성장해 연기가 생업인 장애인 배우 등을 비롯, 다양한 문화인이 탄생하길 바란다”며 “이를 위해선 장애인들만이 아닌 비장애인들의 관심 또한 같이 필요함”을 당부했다.

이어 한씨는 다른 극단에선 보기 드문 가족 같은 순수함과 따뜻함을 휠 극단만의 자부심으로 꼽으며 이번 연극을 통해 관객들 또한 직접 느끼길 바란다고 관람 포인트를 살짝 내비쳤다.

▲ 연습이 끝나고 기념촬영을 했다
ⓒ 김진석
극단대표 송정아(32·지체)씨는 “장애인들이 저 정도 하면 잘하는 거네, 혹은 장애인이니깐 봐 줄만 하네 라는 동정의 시선을 가장 경계한다”며 “장애인들 스스로도 약한 의지나 생각은 근절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진짜 좋아해 미치면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가장 뿌듯했다”며 “다른 극단에 비해 비록 극을 올리고 준비하는 시간은 더 걸려도 여느 프로 극단 못지않게 제대로 된 연극을 보여 주고 싶다”고 다짐했다.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나 둘 단원들의 눈이 충혈되고 목소리 또한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들에겐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하다. 지친 탓에 대사의 속도도 점점 느려져 1시간짜리 대본이 2시간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후 연습이 끝난다 해도 휠체어를 탄 몸으로 연습실 밖 미끄러운 비탈길을 지나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팔과 다리가 돼 주며 진짜 제대로 된 연극을 만들기 위해 더디고 고된 연습을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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