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이제 나는 제주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제주만이 지닌 맛과 멋 그리고 그 속에 피어나는 인정, 음식과 풍습, 제주방언 등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주인들의 생활풍습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는 성읍민속마을을 찾았다.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는 제주도가 방위상 3현으로 나뉘어 통치되었을 때 정의현의 도읍지였다.
특히 성읍리는 유형 무형의 많은 문화유산이 집단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초가가 가장 잘 보존돼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성읍민속 마을에는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마을 한 가운데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다. 또 느티나무 맞은편에는 정의현감이 집무를 보았던 일관헌과 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성읍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가 마치 고향집처럼 포근하였다.
"누구네 집을 먼저 방문할까?"
망설임 끝에, 물 허벅을 등에 짊어진 여인상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도심지 같으면 높은 벽에 대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그것도 모자라 보조 열쇠나 암호, 무인시스템까지 겸비하였을 텐데 성읍마을에는 모든 것이 열려 있었다.
대문을 찾아야겠는데 사방이 열린 문이니 어디로 들어가야 하지? 한참을 망설였다. 정낭이 눈에 띄었다. 뼈만 앙상한 기둥에 걸쳐있는 정낭. 가슴에 뭔가가 뭉클해지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우리조상들이 모질게 살아왔던 삶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마당 한 켠에 서 있는 연자방아, 멍석, 태왁, 항아리 등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이곳에서라도 흙을 밟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올래 길로 이어지는 또 다른 집은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뿌리가 2개나 버티고 있었다. 기둥이 2개나 있는 것으로 봐서 옛날 양반이 살았던 집인가 보다. 이곳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조상들의 지혜였다.
지붕 밑 부분에 이어진 '풍채'를 보고 여름과 겨울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풍채는 겨울에는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여름에는 그늘을 만들어 준다고 한다.
어느 집이나 화장실은 있는 법. 마당 뒤쪽에 있는 화장실에 가보았다. 지붕도 없는 화장실에는 돼지 한 마리가 배가 고픈 듯 꿀꿀거리고 있었다. 제주의 통시문화. 한마디로 똥돼지. 누군가가 변을 보면 돼지는 그 밑에서 변을 받아먹는다는 통시문화. 돼지는 관광객들의 관심에 신이 난 듯 짧은 목을 길게 빼고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당 빨랫줄에는 설익은 감을 으깨어 염색을 한 광목이 바람에 펄럭였다. 아마 이 집주인은 농사철에 입을 옷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가 보다.
마당 곳곳에는 빗물을 받기 위해 항아리가 준비돼 있었다. 옛날 물이 귀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런데 또 한가지 감동을 받은 것은 빗물을 걸러주기 위해 짚으로 동여맨 지혜의 흔적이었다. 마치 현대인들이 수돗물을 정수기로 걸러먹듯 우리 조상들도 머리를 짜냈으니 이처럼 지혜로울 수가 있을까?
또 다른 초가에서 내가 만난 것은 생전에 살아 계시던 시어머님에 대한 추억이었다. 애기구덕과 물 허벅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초가 앞에 서자 예전에 내가 시어머님께 고집을 피웠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시어머님께서는 애기구덕을 사오셨다. 그리고는 " 얘야! 이제부터 아기는 이곳에 눕히거라" 하시면서 손수 시범을 보이셨다.
당시 나는 그 애기구덕에 아이를 눕히는 일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님의 말씀을 거절했다. 당시 어머님께서는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나는 끝내 첫 아이를 키우면서 그 애기구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기구덕만 보면 예전에 시어머님과 불편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이렇듯 성읍민속마을에는 전통적인 초가집과 제주 특유의 풍물인 돌하르방, 대문과 출입구 역할을 하던 '올래', 돼지우리와 화장실을 겸하던 '통시', 바람막이 울타리인 돌담, 물을 길어 나르던 물허벅, 애기를 뉘여 재우던 애기구덕 등 제주의 옛 생활모습을 볼 수 있다.
축제 때마다 힘을 겨루던 '등 돌 들기' 도 보였다. 저 무거운 돌을 한 숨에 들어 올렸다니, 옛사람들은 지혜뿐 아니라 힘도 장사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어보니 나무로 불을 지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궁이마다 시커먼 솥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왕할망 집 초가지붕에 엮어진 새끼줄은 인상적이었다. 새끼줄 하나만 그 매듭이 풀려도 아마 그 띠는 풀어질 것이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엮어놓은 초가의 새끼줄처럼 한사람 한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성읍민속마을 찾아가는길은 제주공항- 동부관광도로- 성읍민속마을로 50분 정도가 소요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