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정말 그랬다. 지난 주일, 예배를 한 시간 가량 앞두고 준비하던 중 난데없이 조카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의식불명 상태라는 급한 연락을 받았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마디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밤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이런 뜻밖의 참변을 당한 거였다.
복잡한 가정사로 인하여 어렵게 자란 아인데, 왜 하필 그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님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제 중학생, 아직도 살아갈 날이 창창한 나이에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조카를 보면서 인생의 허망함에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왜 이런 불행한 사고가 터지는 것일까? 미욱한 인간으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행한 일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그 중에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천재지변도 얼마든지 많다.
폭설이나 태풍으로 하루아침에 삶의 뿌리가 뽑힌 숱한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이럴진대 이 모두를 맹목적 종교인들 마냥, 무턱대고 신의 섭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돌리기엔 너무 무리가 따른다. 그런 신이라면 신의 비도덕성과 몰인정 때문이라도 정상적 인간이라면 도무지 믿기 힘들어질 것이다.
심란한 김에 집어든 책이 유대교 랍비인 쿠쉬너의 이 책이었다. 책의 표지나 편집 상태가 세련되지 않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에 저자의 다른 책을 접해보았기에 순전히 그를 신뢰하고 읽은 것이다. 쿠쉬너는 조로증에 걸려 장애아로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 아론을 생각하면서 그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인간이 살면서 필연적으로 접하게 되는 삶의 부조리와 고난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지루한 이론으로 논증한 것이 아니고 풍부한 사례와 솔직한 의문을 가지고 쓰고 있기에 널리 공감하는 바가 크리라고 본다.
그의 생각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주는 것은 운명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널리 알려진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신앙으로는 의인의 고난에 대한 납득할만한 답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 깔려있다.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홀로코스트) 이후에 신학은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신정론적 난제에 봉착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문제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성서 <욥기>에서 적고 있듯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의인의 고난과 비극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저자는 내용 중 <욥기서>를 재검토하면서 그 한계점과 의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당면하는 부조리한 삶의 문제를 대답 없고 방향 잃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소진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
즉 "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지는가?"가 아니라 "이제 내게 이 일이 벌어졌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훨씬 더 나은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내는 건 바로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살아갈 힘을 줌으로써 우리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종교에 대해 벽을 쌓는 일이다" <156쪽>
이러한 저자의 해결책은 위로와 설득력은 있을지라도 신관에 있어서 아직 해명해야할 미진한 구석이 많아 보인다. '기도로 병이 나을 수는 없을 것이나 위로의 힘은 줄 것'이라는 식의 해법은 얼마나 간편한 것인가? 어떤 신학자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전지전능함이 포기된 채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신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악의 문제에 속수무책이며 무기력한 신이라면 인간이 굳이 그를 믿고 의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초월적 유신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범재신론 등 새로운 신관이 제시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신정론의 문제는 아직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렇더라도 인간에게 닥치는 불행한 일들에 대한 저자의 정직하고 진지한 성찰은 충분히 읽어둘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