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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는 반드시 표지가 있다!

▲ 마드리드
ⓒ 'KOKI'
▲ 빌바오
ⓒ 'KOKI'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너무도 많다. 하지만 어떤 여행인가에 따라 그 준비물은 내용과 시작부터 달라지게 마련인 법이다.

쉽게 떠나는 수학여행, 혹은 보너스 받아서 북적대는 도시를 탈출해 낭만의 휴양지로 떠나는 여행, 아니면 그 잘난 로또 복권 당첨돼서 온식구가 외국으로 도망치는 여행 등.

바싹 말라비틀어진 몸을 보충하는 젖줄 같은 여행인 경우는 그야말로 돈과 준비물만 있으면 언제나 ‘요이~땡’이라지만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시간의 흐름대로 어디론가 무엇인가를 찾아서 떠나야하는 인생의 여행은 사실 나침반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갑자기 여행기를 쓰다말고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들먹이는 이유가 있다.

캠핑카를 이용해 전 유럽을 돌아다니는 이번 여행은 설렘, 휴식 같은 즐거움, 그리고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떠난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의 표식-즉, 누군가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길을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막연한 행운이나 불길함 같은 존재의식-은 문제의 나라 스페인이었다.

▲ 몬리얼역
ⓒ 'KOKI'
▲ 스페인 북부 항구마을
ⓒ 'KOKI'
사실 여행하는 동안 조그만 숙소이기도 하고, 움직이는 교통수단이기도 한 캠핑카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여행 책은 기본이고, 그 외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몇 권과 요리 책 한 권이 이 침대, 저 침대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또 한 권의 책은 어떤 얼뜨기 양치기 청년이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해 연금술을 배우러 사막으로 떠나는, 다소 황당한- 리얼리티가 현저히 떨어지는- 이야기가 실린 코엘료의 장편소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책들은 그저 그냥 그렇게 우리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스페인에서 만큼은….

고속도로에서 완전히 털리다

▲ 스페인 중부 아라곤 지역
ⓒ KOKI
▲ 스페인 중부 시골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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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프랑스의 망통과 니스 그리고 모나코와 칸을 아우르는 코트 다쥐르를 지나는 동안 나는 무라카미 류의 해박한 식습관과 변태적인 여자관에 대해 약간은 동감했었다. 그가 말한 레스토랑과 호텔 그리고 거기에 걸맞는 사람들과 자동차 그리고 멋진 카지노를 차례로 보면서 즐거운 여행은 이런 것이라고 내심 쾌재를 불렀었다. 하지만 그 달콤 쌉싸름한 해변여행은 결혼 첫날밤 온몸에 문신을 하고 나타난 남편의 아찔한 과거처럼 스페인에서 와장창 하고 멋지게 깨지기 시작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진입 고속도로 제7번 휴게소에서 우리는 스페인 집시들에게 완전히 무장해제 당한 채 최루가스에 취해 여행 중 가장 중요한 물품들인 노트북과 카메라를 털리고 말았다.

이태리 나폴리 방문이후 최악의 사건이었다. 스페인은 그렇게 나에게 사정없이 친밀하게(?) 다가왔다. ‘무라카미 류의 속삭임이 그렇게 좋더냐? 자식들아 코트 다쥐르 좋아하고 자빠졌네. 여긴 스페인이야, 정신 차리라구, 이 멍청이들아! 그래!’ 우린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던 것이다.

스페인은 나에게 처음으로 여행의 표지를 알려주었다. 내가 여행에서 대체 무엇을 느끼고자 하는 것인지, 여기에 왜 왔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그런 의심의 여지가 없는 표지였던 것이다.

내가 그때부터 손에 들고 줄기차게 스페인의 아라곤 지역을 -사실 도난 사건말고도 바르셀로나에서는 동네 양아치에게 바퀴를 칼로 찔려 펑크가 나는 고약한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무조건 직진으로 스페인을 빠져 나가기로 결심했다 - 지나가며 읽은 책은 바로 연금술사였다.

어떤 여행의 조건 - 마크 툽을 이해하다

▲ 중부의 작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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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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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플라멩코요 고로, 집시의 나라이다. GNP는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높고 월드컵보다 더 장사가 잘 되는 프리메라리가를 만든 독특한 나라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등의 대도시를 거쳐 스페인 중부 아라곤 지역을 힘차게 넘어오는 동안 스페인은 두번의 불쾌한 경험과는 다른, 멋진 풍경들을 보여주었다. 그 풍경들은 마치 미처 맞추지 못한 넓은 퍼즐들처럼 땅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차를 몰고 지나가다 보면 세상에 무릉도원도 이런 무릉도원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 KOKI
ⓒ KOKI
스페인에서 우리는 일부러 고속도로를 전혀 타지 않고 내내 국도를 고집했다. 스페인 중부의 작은 시골마을 카스텔랴, 6시간 동안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겨우 발견한 고대의 요새도시 미란다 델 카스티아노, 인적조차 드문 자갈길 위에 장식된 운해의 언덕 뮤니코, 작은 돌무덤 같은 시골 길이 인상적이었던 산틸라냐까지 스페인의 작은 마을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푸근하고, 다정한 느낌들을 수채화처럼 진하게 다가왔다.

여행이란 본시 버리거나 얻거나 둘 중 하나다. 만약에 시간에 쫓겨 비행기로 허둥지둥 이동하거나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쇼핑타운 속에서 여행을 마쳤다면 나는 아마도 여행이 정말 사치스러운 것임에 틀림없고, 그 속에 일어나는 모든 불길한 일들은 죄다 안 좋은 경험으로만 간직하고 말았을 것이다.

스페인은 사람으로서 혹은 풍경으로서, 또는 연금술사라는 이야기의 적절한 배경으로서 완벽한 내 마음 속 표지가 되어주었다.

버릴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한 여행을 이해한다는 것은 스페인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고 결과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결과를 잘 풀어진 말로써 혹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써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는 단서만 제공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차마 죄송할 따름이다.

"마크 툽(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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