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철도청 홈페이지에는 팝업창이 하나 떴다. 철도청 '고객의 소리' 게시판이 접속 건수 증가로 회신이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31일에 고객의 소리에 등록된 게시물만 해도 무려 205건에 달했다. 2월 말만 해도 하루 평균 30~40건의 글이 올라오던 이 게시판이 갑자기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바로 고속철 개통에 따른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등 일반 열차 축소 운행 등에 항의하는 시민 여론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철도청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하나를 살펴보자.
지금까지 모든 언론에서는 고속철의 편리함에 대해서만 보도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민들의 편리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기자가 지난 한달 동안 고속열차와 관련한 기사를 쓰면서 느낀 점도 이와 비슷했다. 기자는 2월 27일 기사를 시작으로 고속열차과 관련해 총 5편의 기사를 썼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언론들은 고속열차의 좋은 점만을 부각시켜 왔다. 기자가 고속열차 개통에 따른 문제점을 계속 지적했지만 다른 매체에서는 비판적인 기사를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장밋빛 청사진만이 넘쳐났을 뿐이다.
고속철의 저속철화만 문제? 운행 감축 등 일반 열차 문제는 다루지 않아
개통 다섯달 전부터 언론에서는 고속열차를 싸게 탈 수 있다는 철도청의 발표를 자세한 설명 없이 막연히 '최대 40%(최종적으로는 60%로 확정) 싸게' 탈 수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기차표를 1, 2주 전에 예매하는 승객들의 관습상 실제 할인받을 수 있는 비율은 그리 크지 않다. 실제로는 30~60일 전에 주말표를 예약했을 때 20%의 할인율을 적용받으며, 40% 할인은 30일짜리 정기 승차권 구입자에게만 해당된다. 적어도 "통근자는 최대 40% 할인"이라는 제목을 달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나마 최종 확정된 60% 통근 할인을 받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속열차의 출퇴근 시간대의 배차 간격이 길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열차의 아침 운행도 줄어들어 일반 열차에 해당하는 40% 정기승차권 할인 혜택을 보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정기 승차권도 30일 내 사용으로 한정되어 30일 분량의 정기 승차권을 구입하고도 20~25일밖에 쓰지 못하는 통근자들도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보도하는 언론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출발역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경부선을 제외한 대부분의 열차가 용산역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일찍이 보도자료를 통해 알려졌지만 일반 시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결국 3월 24일 고속열차 예약 시작 당일부터 큰 혼선을 빚었다. 27일에서야 철도청은 이 사실을 예약 홈페이지에 공지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아예 없었고 출발역이 용산역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사도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언론은 고속열차가 정차역 증가로 저속철이 되는 것은 상당히 우려하면서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통일호화(?) 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열차 시각표 개정안에 따르면 새마을호는 정차역이 증가해 고속버스보다 훨씬 비싼 요금을 지불하고도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새마을호가 38년 전 수준으로 운행 시간이 길어졌다"는 한 시민의 말처럼 새마을호와 무궁화호의 장거리 운행 시간은 1시간 이상 길어졌다. 지난해 12월 고속열차 개통에 따라 새마을호의 정차역이 늘어난다는 철도청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를 주목하여 다루지 않았다.
@ADTOP@
또한 주중 요금을 15% 할인해 주는 탄력운임제도가 폐지되었는데도 이를 보도하는 곳도 거의 없었다. 철도청은 2002년 요금 인상과 함께 월·금요일 5%, 화~목요일은 15% 할인(주말 요금 기준)해 주는 탄력운임제도를 운영했다. 하지만 이번 고속열차 개통으로 이 제도는 폐지됐다.
그 대신 철도청은 예매일에 따라 최고 20%(2개월 전 주중 예매시)에서 최저 3.5%(14일~7일 전 주말 예매시)에 이르는 할인 제도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중이든 주말이든 6일 전에 예매를 했을 때에는 조금도 할인 받을 수 없다.
이런 언론들이 목소리 높여 지적하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안전 문제다. 하지만 그 안전 문제도 기계 결함과 같은 부분만을 지적할 뿐 정작 기관사 부족이나 선로 보수 인원 부족으로 인한 안전사고 발생 우려에 대한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시승시에 승객 중 상당수가 역방향으로 배치된 일반실이나 비좁고 불편한 좌석에 대해 지적했지만 대다수 언론에서는 이를 가볍게 지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고속열차 좌석의 불편함은 승객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부분이며 심지어는 무궁화호보다 불편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당연히 시승해 보았을 일부 언론에서는 오히려 내부 시설이 쾌적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속철 이용한 출퇴근 가능할까?
대다수 언론들은 고속열차가 지방의 산업 발전을 이끌어 갈 것처럼 보도했다. 이는 서울과 수도권 등에서 지방으로의 왕래가 간편해지므로 지방이 발전할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기가 간편해져서 지방에서의 소비는 줄고 서울의 소비가 늘어날 수도 있다. 즉,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역집중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다수 언론들은 고속열차가 개통되기만 하면 국토 불균형 문제를 저절로 해결할 수 있는 마술상자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다면 과연 고속열차를 이용한 출퇴근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렇게 출퇴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철도청 게시판에는 이와 관련한 게시물이 많이 올라와 있다. 한 시민은 고속열차가 개통되고 나면 천안 지역으로 이사하려고 했으나 서울로 올라오는 첫 차가 7시라서 포기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출근 시간에 천안아산역에서 서울로 운행되는 열차는 7시 7분과 7시 31분, 딱 두대뿐이다. 그 다음 열차는 9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각각 7시 49분과 8시 9분이 된다. 보통 9시까지 출근한다고 했을 때 상당히 애매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언론에서는 고속열차 개통으로 항공사와 고속버스업체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물론 고속철이 개통된 곳에서는 이러한 우려가 일정 정도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를 악용해 적자 투성이인 국내 노선을 축소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례로 고속열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서울-사천 노선은 고속열차 개통과 동시에 주 42회에서 35회로 운행이 줄어들었다. 부산, 대구, 광주 등의 노선도 최대 70%까지 줄었다 .
고속열차 환승 기능 취약해
우리 나라 역의 환승 기능은 취약하기 그지 없다. 다른 교통 수단과 환승이 가능한 역은 서울역과 동대구역에 불과하다. 그나마 서울역의 환승 기능도 서울 시내와 인천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승 문제는 고속열차에도 여전하다. 고속 철도에서 일반 열차로 갈아타는 데 환승 대기 시간만 평균 30분 이상 걸린다.
또한 기차역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인근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운송 수단도 엉망이다. 광주역과 대전역에서는 시내버스를 타고 움직여야만 인근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가장 환승 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 동대구역은 인근에 고속버스 터미널을 갖추고 있으나, 정작 경주, 안동, 영주 지역 외의 경북 내륙으로 통하는 시외버스터미널은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실정이다.
고속열차가 국가기간망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고속열차역을 거점으로 하는 환승 교통망 체계가 시급히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환승 할인제만을 운영할 것이 아니라, 고속열차와 일반열차 간의 환승 체계도 지금보다 신속하고 편리하게 설계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4월 1일 고속열차는 개통됐고 초기부터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해 사람들의 우려를 낳고 있다. 정부나 철도청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속열차가 생활 혁명, 물류 혁명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점들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어마어마한 국가 예산이 투입된 만큼 제대로 된 고속열차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