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땅 위에 새로 복원된 삼양동 선사유적지 주거지는 마치 추수가 끝난 뒤 볏집을 쌓아 놓은 것 같았다. 움집 안에 들어간 나는 숨이 막혔다. 대낮인데도 캄캄한 움집 안에서 내가 버틴 시간은 단 30초. 잠시의 어둠도 참지 못한 나는 최소한의 인내를 참지 못하고 문명의 이기를 탓하고 있었다.
제주시내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삼양 2동 1559번지 일대. '음나물 내'라는 소천이 흐르는 이 지역은 해발 고도 20m 내외의 마을로, 동쪽에는 해발 172m의 원당봉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별도봉이 자리잡고 있다.
제주시 삼양2동 지역은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국내 최대 규모의 마을 유적지로 선사시대 생활과 도구, 선인들의 삶을 전시한 곳이다. 또 이곳은 고대 마을의 옛 모습을 드러낸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의 송국리 주거문화 말기 단계를 설명할 수 있는 마을 유적지이기도 하다.
먼저 차를 세우고 삼양동 선사유적지에 들어서니 물 허벅을 진 여인이 선사유적지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흐드러지게 핀 노란 유채 꽃 사이로 보이는 반쪽의 쪽빛 바다였다.
삼양동 선사유적지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자 귀에 익은 제주민요가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오돌또기'를 따라 부르며 선사유적지 전시관에 들어서니 전정에 매달려 있는 백열전구의 불빛이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되어 전시관을 밝혔다.
"유구한 시간의 강을 건너 가름하기조차 힘든 기억을 더듬는 일, 세상이 열리고 그 하늘 아래 자신의 터전을 일구었던 선인들의 삶의 흔적을 조심스레 들춰보는 일은 우리에게 경이로는 경험이다.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선인들과 만나는 시간. 지금의 우리를 과거 선조들의 모습에 비춰보고 미래를 살아갈 우리 모습을 그려보자."
영상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제주 삼양동 그 역사 속으로'는 정말이지 유구한 시간을 더듬게 했다. 전시관에서 어로생활과 음식문화·가족문화·도구 사용·농경문화· 수협활동·혼례문화·주거문화 등을 하나씩 훑어봤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추고 전시관의 유리벽에 눈을 가까이 들이댔다. 유리벽에 좀더 얼굴을 가까이 대면 그들이 살아왔던 흔적을 느낄 수 있을까?
전시관 안에 마련해 놓은 움집 안에는 한 가족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매스컴에서 원시인들의 풍습을 담은 화면을 본 적이 있으나 삼양동 선사유적지 전시관에서 보는 원시생활 모습은 더욱 애틋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특히 내세를 믿고 죽은 자를 통해 공동체의 풍요를 빌기 위해 여러 사람을 함께 묻는 가족무덤이 인상적이다. 죽어서도 가족간의 끈끈한 정에 연연하는 그들의 풍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더구나 넓은 농경지를 얻기 위해 나무를 베거나 집을 짓기 위해 목재를 가공하는 것은 지금 현대인들이 자기 땅과 부를 축척하기 위해 땅을 확장시키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1996년 제주시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주거지 유구와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자 제주시가 이 일대 유적 발굴에 나서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사결과 검은 모래로 유명한 삼양해수욕장 뒤편 대지를 끼고 길게 연결되는 장타원의 유물분포 범위가 나타났다. 3차에 걸친 발굴조사결과 삼양동 유적지에서는 모두 23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또 소토 유구 11기와 석축 유구, 도로다짐 유구, 구상 유구, 폐기장, 패총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인근 바다에서 조개류와 물고기들을 잡기 위해 칼 화살촉이나 조개껍질, 물고기 뼈들을 이용한 흔적도 나왔다. 또 수렵과 농경, 어로 등을 통해 얻은 음식물들을 화덕과 토기를 이용하여 익히고 저장하였던 식생활 문화는 현대인들의 식생활 문화와 일치하는 점이 많았다. 더구나 삼양동식 토기는 기본적으로 옹형이 크고 작은 적갈색 경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구연부가 직립하거나 외반도가 대체로 약하고 짧다. 석기와 토기 등을 보고 우리 선인들의 삶을 느끼는 순간이 되었다.
전시관을 나와 야외전시장에 들어서니, 당시 답사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여름 햇빛에서 발굴작업에 진땀을 흘렸을 발굴조사단의 피와 땀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거지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움집 안으로 들어가 봤다. 움집 입구는 정방형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만 했다. 주거지는 내부 중앙에는 타원형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다시 그 양단에 기둥구멍이 있었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단면이 타원형과 삼각형인 점토대 토기, 삼양동식 적갈색 토기, 파수부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우리 나라 청동기 문화의 마지막 단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마을 복합 유적이다. 따라서 현재 노출되어 있는 원형 수혈 집자리 등의 유구 상태는 당시 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어떤 이는 '유적지의 발굴 조사는 발굴자체가 바로 유적을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유구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최상의 보존 방법인지, 아니면 유적지를 발굴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개방하는 것이 최상의 보존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 제법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더 큰 평수의 아파트를 꿈꿔왔던 나는 삼양동 선사 유적지에서 서너 평도 안 되는 주거지를 돌아보고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탐욕이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를 깨달았다.
삼양동 선사 유적지에서 입체영상과 유물과 만난 시간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역사를 기행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 저 움집 안에서 나는 살아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