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4일 '퇴뫼산을 지키기 위한 나무심기 주민 한마당'이 1부 행사에 이어 곧 2부 '음식 함께 나누기 행사'가 진행되었다. 마을회관 옆 마당에 차일을 치고 마련해 놓은 수십 개의 식탁에서 모든 참석자가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조개젓과 조갯국, 명태찌개, 돼지수육, 집에서 만든 두부에다가 고장 양조장의 막걸리 맛이 일품이었다. 주민들은 오늘의 잔치를 위해 직접 돼지를 잡는 수고까지 했다.
이어 3부 행사를 위해 모두 삽과 소나무 묘목을 들고 퇴뫼산으로 행했다. 안흥 골프장 건설업체인 '리치빌개발'에서 벌목작업을 실시한 곳에 소나무 묘목 500주를 심는 일, 나무들에 '희망쪽지'를 다는 일, 그리고 퇴뫼산 정상 백제시대 '구수산성'의 흔적을 탐사하는 일이 3부 행사였다.
산을 오르는 도중 누군지 모를 땅꾼이 뱀을 잡기 위해 지난해 가을쯤 설치해 놓은 듯한 그물을 제거하는 일을 했다. 그물의 중간 중간에는 여러 개의 덫이 있었고, 어떤 덫에는 뱀과 쥐가 기어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말라죽어 있었다.
산중턱 한 곳에는 위압적인 내용의 '경고판'이 세워져 있고, 경계를 표시하는 줄이 길게 쳐져 있었다. 그 경고판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경고 / 이 구역은 사유지이며 토사채취 구역으로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진행중인 사업부지입니다. 당해 사업부지에 무단 출입하거나 사업을 방해할시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됩니다. / 2004. 3. 3 / 리치빌개발주식회사 / 현장소장 백>
다분히 퇴뫼산을 지키려는 두야리 주민들을 위협하면서 사업 강행 의지를 은연중에 내비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주민들은 경계 표시 줄을 우회해서 일단 정상 부근까지 오른 다음 벌목 현장으로 접근했다. 울창했던 수천 그루의 소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벌목 현장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탄식을 했다.
퇴뫼산에서 내려다보는 두야리 와동과 신동 마을은 병풍 같은 산의 품안에서 더없이 아늑해 보였다. 그리고 비산비야와 시원한 노해를 끼고 있는 장명수바다, 그 아기자기한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여러 개의 섬들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벌목 지역에 사람들은 열심히 나무를 심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출향인 가족들이 정성을 다해 나무를 심는 것 같았다. 한 젊은 아빠는 초등학교 저학년일 듯싶은 어린 아들에게 수많은 나무들이 베어져 넘어진 이유와 그 자리에 다시 소나무를 심는 의미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무심기를 마친 다음 다함께 정상으로 올라가서 구수산성의 흔적을 탐사했다. 산성이 무너져서 흘러내린 돌무더기를 볼 수 있었고, 드문드문 남아 있는 성벽을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고장의 한 동네 두야리의 퇴뫼산에 백제시대 산성 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확인하는 나로서는 참으로 무안하고 죄스러운 심정이기도 했다.
이윽고 산을 내려올 때 올해 환갑을 먹는다는 주민 한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두야리두 옛날 일제 때 징용 끌려간 사람들이 있구, 일본 놈들 군대루 끌려가서 남양군도까지 가서 전쟁을 헌 사람두 있슈. 그리고 6∙25사변 때 군대 간 사람, 인민군 치하에서 강제로 부역을 헌 사람들두 있지유.
또 월남에 가서 전쟁을 한 사람들두 있구…. 그런디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지를 않었슈. 그게 다 퇴뫼산이 우리 마을을 잘 보듬어주는 덕분이지유. 이것은 옛날 으르신들이나 지금의 우덜이나 똑같이 노상 허는 생각이유."
"예,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나는 깊은 감동을 안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초등학교 동창인 주민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산의 소유주가 옛날에 서울 사람으루 배낀 것두 원인 중의 하나여. 이 산이 계속 우리 두야리 사람 소유루 있었으면 오늘 같은 사단이 생기지 않었을 텐디….
옛날 읎이 살던 시절에 자식새끼들 갈치면서 먹구 살다보니께 가랭이 찢어지는 헹편에서 산을 팔지 않구 배길 수가 있었간…."
자신의 아버지나 가까운 누가 퇴뫼산의 소유주였던 것이 아님에도, 그 친구의 음성에는 어떤 회한 같은 음결이 묻어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마을회관 마당에서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잘 삶아진 돼지수육과 새우젓, 김치 그리고 집에서 만든 따끈따끈한 두부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나는 마누라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여러 잔이나 마셨다. 차 운전대는 마누라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행사에 참석한 내게 거듭 감사를 표하는 주민 한 분이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다.
"농산물 수입 개방 때문에두 앞으루 우리 농민들의 생활이 더 어려워질 텐디, 골프장 때문에 살기가 더 힘들어질 것 같유. 군청에서야 일년 세수(稅收) 6억 원이 더 가치 있는 일일 테지먼, 우덜은 고된 농삿일 숙이서두 골프장에서 골프나 치며 사는 팔자 좋은 사람들을 맨날 보구 살어야 헐 테니, 우리 농민들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더 고달프겄슈. 안흥에다가 골프장을 짓는 일은 우리 농민들 따위는 아예 안중에두 읎다는 뜻이지유, 뭐. 안 그렇대유?"
나는 말문이 막히는 심정이었다. 안흥 골프장 건설은 이미 두야리 퇴뫼산 훼손 문제만을 안고 있는 상황이 아닌 셈이었다.
퇴뫼산 훼손이 주민들과 출향인들에게는 '고향 상실'이라는 확대된 의식으로 연결되듯이, 안흥 골프장 건설이 주변의 농민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지레 감지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그리고 지금은 어떤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가치 못지않게 정신적인 가치나 문제도 깊이 고려해야 하는 시대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실감하면서 취기 속에서도 크게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