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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엔 '박정희 신드롬'이 판을 치는가 싶더니, 21세기엔 '박정희 향수'가 다시금 판치고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그건 다름 아닌 '경제 성장'과 '문화 유산' 때문이다. 적어도 박정희 정권 때에 아파트라든지 고속도로, 고층 빌딩, 자동차, 그리고 지하철이 등장했다.

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유적지나 건축물, 봉산탈춤이나 무형문화재, 그리고 박물관 같은 전통 문화 보존 시설 등이 그때부터 비로소 복원되거나 건축되기 시작했다.

그마만큼 경제발전을 일궈낸 일등 공신, 전통 문화유산을 보존·복원시킨 일등 공신이 바로 박정희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 사회는 '박정희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경제개발계획은 박정희 정권이 세운 게 아니다. 이미 장면 정부가 만들어 놓은 것을 보완해서 시행했을 뿐이다. 그뿐만 아니다. 그 경제발전의 공로도 박정희 정권의 정부측 주도자들에게 있었던 게 아니다. 오로지 산업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하루 평균 14시간씩 피땀 흘리며 일해야만 했던 그 당시의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전통문화 유산의 보존 및 복원이라는 것도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려는 그 자체의 선한 뜻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박정권 자신이 감행한 군부통치의 나쁜 이미지를 좋게 희석시키려는 정치적 목적 하에 시행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한낱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가? 전재호가 쓴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2002)란 책을 보면 확연히 드러나 있다.

왜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꺼낼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자신이 대학 강단에 섰을 때, 학생들로부터 받은 어처구니없는 과제물의 결과물 때문이었다.

"학생들의 글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여학생들보다 남학생들이 상대적으로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그것은 강력한 리더십과 카리스마 때문이라는 이유가 눈에 띄었다. 그들이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다른 조사들과 유사하게 경제 발전 성공, 청렴결백, 리더십과 카리스마 그리고 인권도 경제가 발전된 후에나 가능하기 때문에 등이었다."(책·을·쓰·게·된·동·기)

우선, 전재호는 책제목에서도 그렇듯이 박정희를 두고서 '반동적 근대주의자'라고 전제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전재호는 그에 대해 '반동적'이란 말이 단순히 '반민족적'이라는 뜻이 아님을 피력한다. 그것은 서구의 근대성에 비춰 본 진보성, 혁명성, 합리성, 그리고 민주성 등이 거세됐다는 의미에서의 반동적 근대주의자란 뜻이다.

"박정권은 근대화를 양적인 경제성장으로 축소시켰고, 그것도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실적만을 중시하는 성과주의에 의해 지배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경제 성장을 위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제한하는 반민주적인 형태 역시 근대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의 결과였다. 그 결과 박정권의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민주성, 혁명성, 합리성이라는 서구 근대성의 핵심 요소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박정희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로, 박정권의 근대화 과정을 '반동적 근대주의'라고 지칭한다."(p.16)


그렇다 하더라도 전재호는 박정희를 고해성사하거나 그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하지는 않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단호하다.

"당시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 과제인 통일과 민족통합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화에는 큰 해를 끼친 것이 분명한 까닭에, 결코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찬양할 수 없을 뿐더러 '긍정 반 부정 반'으로 두루뭉실한 입장을 취할 생각이 없다.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반동적 성격을 갖는다는 게 이 글의 핵심이다."(p.34)

그런 의지를 지니고 있는 이 책은 크게 3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우선 박정희를 평가하는 민족주의의 여러 관점들을 구분해주고 있고, 2장에서는 박정권이 취한 군부쿠데타의 정당화와 정권 연장이라는 정치적 목표에 종속시켰던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 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3장에서는 우리 사회를 휩쓴 박정희 신드롬의 등장 과정과 성격 등을 설명해주고 있고,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한 몇 가지 단상도 제시해 놓고 있다.

더하여서, 전재호는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잣대가 결코 저자 개인만의 견해가 아닌 다수의 공통된 시각임을 입증해주는 여러 가지 책들도 소개해 놓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역사의식과 역사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다 그렇게 말한다.

"그래도 과오보다 공적이 많지 않았던가?"

이는 '박정희 향수병'에 톡톡히 빠져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장할 노릇이다. 괜히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열불 난다. 그 잘난 박정희의 공적이란 아파트 지어주고, 고층빌딩 세워주고, 돈에 환장하게 만든 배금주의와 물신주의가 아닌가. 그 속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이 땅의 원혼들은 또 누가 보상해주겠는가.

그와 같은 심각한 병리 현상 중의 하나인 '박정희 향수병에 중독'돼 있는 사람들을 향해 전재호는 그렇게 말하며 끝을 맺고 있다.

"박정권하에서 행해졌던 인권 유린, 민주주의 파괴, 노동자에 대한 억압은 그 시기의 또 다른 얼굴이다. 박정권은 북한 공산당의 남침 야욕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 안보를 위해 경제 발전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국민들의 기본권 침해를 정당화시켰다. 그들에게는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도, 노동자의 권익도 희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재는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맺·는·말)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전재호 지음, 책세상(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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