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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을 떠나 다른 시골의 봄을 만나러 가다

삼별초의 고단했던 삶 때문이었을까? 삼별초 유적들을 돌아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에 납덩이가 박힌 듯이 편치 못했다. 그러던 차에 분위기를 새롭게 전환하기 위해 진도의 또 다른 명소 쌍계사와 운림산방을 찾아 다시 왕무덤재를 넘었다.

▲ 첨찰산 쌍계사 현판
ⓒ 김정은
이 곳이 진도에서의 마지막 행선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길가의 꽃 한떨기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길가의 이름 없는 꽃들은 아쉽고도 무거운 내 마음을 알까? 삼별초의 옛자취를 떠나 쌍계사로 가는 길, 물기 오른 새싹은 연초록색 빛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의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 <꽃이 먼저 알아> 한용운


쌍계사 범종이 28번 울리는 까닭

▲ 쌍계사 대웅전
ⓒ 김정은
쌍계사는 857년(문성왕 19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1648년(인조 26년)에 의웅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을 만큼 역사가 유수한 사찰이다.

▲ 북쪽으로는 야트막하지만 진도의 중심산인 첨찰산이 절을 감싼 모습, 절 양편으로는 계곡물이 흐른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하여 쌍계사라 명명되었다.
ⓒ 김정은
북쪽으로는 야트막하지만 진도의 중심산인 첨찰산이 절을 감싸고 절 양편으로는 계곡물이 흐른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하여 쌍계사라 명명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곡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물이 없고 계곡의 자취만 보일 뿐이다.

새로 세운 듯한 일주문을 지나 절 입구를 거쳐 대웅전을 향하니 북쪽의 첨찰산과 대웅전 서쪽의 상록수림을 방풍막 삼아 아담한 대웅전이 보인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명부전, 범종각과 부속 건물이 오밀조밀 배치되어 있었다.

1720년 높이 49cm, 직경 45.6cm, 둘레 143cm 무게가 45.6kg인 쌍계사의 범종. 새벽 예불 때마다 울려퍼지는 그 범종 소리는 운림동 10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유명하다. 조용한 이곳 쌍계사에 명징하고도 낮은 떨림의 그윽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상상해 보라.

새벽 예불 시 상계사 범종은 28번 타종한다. 그 이유는 땅에 사는 중생이나 물에 사는 중생을 구원하는 법고나 목어와는 달리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하고자 28천(天)으로 이루어진 모든 하늘 세계에 두루 두루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란다.

문득 몽고군에 참살 당한 왕무덤재 삼별초의 한 서린 영혼들이 생각난다. 아마 구천을 떠도는 그들에게 이 쌍계사 종소리의 낮은 울림은 구원의 단비임에 틀림없으리라. 오늘도 어김없이 쌍계사의 종소리는 그 묵직한 떨림으로 부드럽게 퍼져나가 그 원혼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 빛난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도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은 없다.
우리들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종소리
잠에 취해 혼미한 새벽,
잠결에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저 맑은 종소리는 도대체 누가 울리는 것인가
- <한밤에서 새벽까지> 이정하


봄옷 입은 첨찰산 산그늘 하루가 다르게 푸르르고

이 밖에도 해발 485m의 첨찰산은 산봉 100여평에 옛날 주요한 통신수단이었던 봉화대가 있어 일명 봉화산이라고도 불린다. 예전에 사명대사가 이곳에 머물며 도를 닦았다고 하니 왠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사명대사가 이 남쪽 끝 외진 곳까지 와서 수도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불하기에는 이 땅에 묻힌 외로운 혼령들의 한이 너무 깊을 텐데…. 외로운 혼령 때문에 이 산의 산 그늘도 더욱 깊어질 텐데….

그러나 첨찰산의 깊은 산그늘도 마침내 다가온 봄은 어쩌지 못하는지, 분명 물 소리 새 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푸릇푸릇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봄옷 입은 첨찰산 산그늘을 따라 쌍계사 옆에 위치한 운림산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저께 엊그저께 걷던 길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걸었습니다
그저께 엊그저께 그 길에서
어제 듣던 물소리
오늘은 어데로 가고
새로 찾아든 물소리 하나 듣습니다
문득 새로워 걷던 발길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귀기울여봅니다
아, 그 물소리 새 물소리
봄옷 입은 산그늘 강 건너는 소리입니다

- <봄 옷 입은 산 그림자> 김용택


운림산방의 150년 된 배롱나무

▲ 운림산방의 인공호수 운림지, 중앙에 소치가 직접심었다는 배롱나무가 보인다.
ⓒ 김정은
한국 남종화의 정신적 고향인 이곳 운림산방은 조선말 남화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말년에 기거하던 곳으로, 일명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운림이란 중국 원말 4대가로 잘 알려진 '예찬'의 호이다. 소치 자신의 호 역시 원말 4대가 중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1269∼1358)의 호 대치(大痴)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와 원말 4대가와의 인연은 매우 깊다고 볼 수 있다.

▲ 운림산방 현판, 운림이란 중국 원말 4대가로 잘 알려진 '예찬'의 호이다.
ⓒ 김정은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있었던 허련은 28세 때부터 대흥사의 초의선사 밑에서 윤선도의 후손인 공재(恭濟) 윤두서(尹斗緖)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했다. 32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秋史) 김정희를 만나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시작하게 된 그는 그 후 천부적인 재질과 노력으로 시, 서, 화에 능하게 되었다.

41세 되는 1848년 그는 헌종 앞에서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당대의 권문세가인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면서 '압록강 이동(以東)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스승인 추사가 공언할 만큼 명성이 높았다.

그의 생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스승이 있었는데 한명은 그를 서화의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그림과 인생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준 초의선사요, 또 한명은 그의 예술 세계를 깊게 해 준 추사 김정희이다. 굳이 또 하나를 든다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넣어준 공재 윤두서의 화첩들이 아닐까?

그래서 일까? 소치 허련은 1856년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 밑에 이 운림산방을 만들었고, 이곳은 미산, 남농에 이르는 한국 남종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운림산방과 운림지의 봄, 범접하기 힘든 완고함이 느껴진다.
ⓒ 김정은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운림산방의 어느 것 하나 남종화의 정신을 표현하지 않은 곳이 없다. 얼핏 보길도의 세연지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드는 인공호수 운림지 한가운데의 조그마한 섬에는 소치가 직접 심었다는 배롱나무(목백일홍)이 의연하게 그 곳을 지키고 있다.

배롱나무는 진분홍 꽃이 백일 동안 피기 때문에 사대부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선비들이 정원에 자주 심었다. 김인후는 소쇄원 48영중에서 배롱나무에 대해 이렇게 예찬했다.

세상의 하고 많은 저 꽃들을 보소
도무지 열흘 가는 향기가 없네.
어찌하여 시냇가에 선 이떨기는
백일내내 홍방을 대하는 거지
- 소쇄원 48영중 친간자미


어찌 보면 시절인심에 따라 인간도 이리 저리 마구 흔들리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이름없는 꽃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럼에도 세파에 흔들리며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일반 꽃과는 달리 한번 피면 주위의 세태가 어떠하든 백일 내내 같은 모습과 같은 향기로 피어있는 백일홍의 모습이야말로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고졸한 진짜 선비의 모습과 닮아보이는 것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 고졸한 의지가 자칫 잘못하면 외부의 변화를 무시하는 스스로의 고집으로 왜곡되어 해석될 수도 있지 않을까?

4대에 걸친 남종화의 유장한 전통의 뿌리가 되고 있는 이곳 운림산방, 그 뿌리가 두껍고 깊게 박혀 있는 만큼 일반인이 다가가기에 뭐라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완고함이 느껴진다.

아직 꽃 피기에는 이른 배롱나무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가슴에 그 뜻을 간직하는 대신 여기 저기 피어있는 붉은 동백꽃을 바라보는 것으로 진도의 마지막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 소치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보이는 정돈된 초가집과 기와집
ⓒ 김정은
진본이 아닌 복제본이 즐비한 소치기념관 관람을 끝으로 자동차는 서울로 향해 허겁지겁 출발했다. 아쉽지만 이제 또 다시 일상의 냉혹한 경쟁 속으로 아무 일 없었던 듯 되돌아 갈 것이다.

▲ 진도를 떠나는 아쉬움에 찍은 진돗개강아지의 천진하고 귀여운 모습
ⓒ 김정은
생각이 많은 만큼 할 말은 많았지만 다 풀어내지 못했기에 아쉬움도 많은 보길도, 진도 여행. 동백꽃을 따라 이곳에 왔을 때는 마냥 설레였지만 하나 둘씩 지는 동백꽃을 두고 떠나올 때 내 가슴 속 빨간 설렘도 어느덧 돌돌 말려 내 기억 속의 저장 창고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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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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