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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소시지 먹기(Eating Sausage)> 촬영 셋째 날은 시내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세트를 갖춰어 놓고 했다. 12시쯤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보니, 욕실로 꾸며 놓은 세트의 마지막 점검이 한창이었다. 지난밤에 촬영이 너무 늦게 끝나서 모두들 새벽에 잠깐 눈을 붙이고 나왔을 텐데도, 별로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나무판으로 벽을 세우고 그 안쪽으로 변기와 욕조와 세면대 등을 설치하고 벽의 한쪽에 문과 작은 창문을 달아 욕실로 꾸며 놓은 세트는 겉으로 보기에 매우 엉성해 보였다. 얇은 나무판으로 세운 벽은 몸을 기대면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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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막힌 작업장 내에 설치된 세트여서 조명도 자연광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공조명에 의존해야 했기에 몹시 눈이 부셨다. 또한 세면대와 욕조의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스들과 조명기에 연결된 케이블들이 세트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다닐 때 조심해야 했다.

사람이 살던 집을 빌려서 촬영했던 지난 이틀 동안과는 너무 다른 촬영 환경이라 나는 조금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어수선해 보이는 세트에서 찍은 욕실 장면들이 실제 집에서 찍은 장면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감독 지아가 촬영감독 지니와 촬영할 장면에 대해서 협의를 하고 있다
감독 지아가 촬영감독 지니와 촬영할 장면에 대해서 협의를 하고 있다 ⓒ 정철용
그러나 그것은 감독인 지아와 촬영감독인 지니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할 테니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그리고 관객들에게 보여 지는 영화에는 카메라가 잡은 세트 안의 장면만 나타날 뿐, 어지러운 세트 주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지.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고 촬영에 임하는데도 지나치게 인공적인 세트 촬영장의 환경 탓인지 쉽게 연기에 몰입하기가 힘들었다. 아내 ‘수정’이 저녁 늦게 수영장에서 돌아오자 욕실에까지 쫓아와 그것을 추궁하는 남편 ‘김’의 연기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야만 했다.

장면 #26 : 욕실, 저녁
수정은 가방에서 수영복을 꺼내 헹군다. 김은 욕실 문 옆에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다.

김 :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수정 : 밖에.
김 : 뭐 했는데?
수정 : 그냥 뭐….

수정은 과시하듯 수영복의 물기를 짜낸 후 옷걸이에 건다. 김은 그걸 힐끗 쳐다본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김 : 저녁은?

수정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노려본다.

수정 : 금방 돼.


위 장면에서 김은 잔뜩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아내 수정을 추궁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수정’을 연기하고 있는 박수애씨의 얼굴을 보자, 나는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지아네 집에서 연기 연습을 할 때, 박수애씨와 나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아도 웃음이 터져 나와서 결국은 연기 연습을 중단해야만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위 장면을 연기하는 동안 자꾸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남편 김은 낯선 환경과 문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남편 김은 낯선 환경과 문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 C. Pryor
여기에 촬영감독 옆에서 카메라의 포커스를 재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스태프 잉아(Inga)의 어설픈 한국말 흉내가 기름을 부었다. 우리가 위 장면의 리허설을 하는 동안 그녀는 수정의 대사 “금방 돼”의 뜻을 우리로부터 배웠는데, 감독 지아로부터 좀처럼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자 우리 앞에서 “금방 돼, 금방 돼” 라고 말하면서 싱글거렸던 것이다.

그 어설픈 한국말 흉내가 내게는 “곰방대, 곰방대”처럼 들렸다. 나는 연기를 하면서 감독의 ‘컷!’ 소리가 떨어지기까지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아냈다. 다행히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 촬영을 끝내긴 했지만, 그것은 다른 장면들보다 많은 대여섯 차례의 시도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위 장면 촬영을 마치자마자 나는 스튜디오의 한 구석에 마련된 분장실로 달려갔다. 내가 웃는 걸 보면 박수애씨에게도 전염이 되어서 촬영에 지장이 생길까봐, 나는 분장실에서 몰래 혼자서 웃다가 나왔다.

이날의 촬영 분량은 모두 8개 신이라 조금 일찍 촬영이 끝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날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자정을 넘어서자 잉아는 계속해서 “금방 돼, 금방 돼” 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를 웃겼다. 예정 시간에서 두 시간을 훌쩍 넘긴 새벽 2시가 지나서야 촬영이 모두 끝났다.

셋째 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촬영을 모두 마쳤다. 그러나 박수애씨는 수영장 촬영 장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촬영이 없었지만 아내와 함께, 오클랜드 서쪽 지역에 있는 한 수영장에서 찍는 마지막 날의 촬영 현장을 찾아갔다.

마지막 촬영일인 수영장 장면에서는 카메라 장비로 크레인까지 동원되었다.
마지막 촬영일인 수영장 장면에서는 카메라 장비로 크레인까지 동원되었다. ⓒ 정철용
카메라 장비로 크레인까지 동원되고 수영장 바깥에 한 떼의 구경꾼들이 몰려 있는 것이 제법 영화 촬영장다웠다. 박수애씨는 새벽 2시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 물속을 들락날락해서 이제 지겨워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걱정했던 수중 촬영 장면을 새벽녘에 무사히 끝내서 이제 쉬운 장면들만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나는 촬영을 마치는 시간까지 지켜보려고 했지만, 이날도 원래 예정된 시간인 오후 2시에 촬영이 끝나기는 어려워 보였다.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현지 아줌마들과 함께 찍어야 할 몇 장면이 아직 남아 있는 박수애씨를 격려해주고, 나와 아내는 자리를 떴다. 나중에 박수애씨가 전해준 바로는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촬영이 끝났다고 하니,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길고 피곤한 하루였으리라.

오디션부터 시작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연기 연습을 했던 지난 7개월간 그리고 4일간의 촬영을 마지막으로 박수애씨와 나는 영화 <소시지 먹기>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감독인 지아에게는 아직 긴 후반작업(post production)이 남아 있다.

적어도 2~3개월이 걸린다는 그 후반 작업이 모두 끝나야 우리의 영화 <소시지 먹기>를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궁금하다. 어설픈 초보연기자들의 연기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 있을까? 지아가 원했던 대로 정말 자연스러운 연기가 담겨있을까?

15분짜리 단편영화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기까지 또 긴 시간을 인내해야 하니, 영화란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심을 시험하는 예술인 것 같다. 그 인내심의 끝에 만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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