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지도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처럼 지난 10년 동안 한반도의 남북관계에도 거대한 지각변동이 있었다.
갈라진 조국의 정상이 반세기 만에 두 손을 마주 잡는 광경을 연출해냈고, 비전향 장기수도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북한 땅을 민간인이 밟을 수도 있게 되고 이산가족의 정기적인 만남도 이루어졌다. 냉전시대의 대립과 무조건적인 반공을 떠올려보면 실로 놀랄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문익환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문익환 평전>이 출판되었다. 문익환 목사라고 하면 그의 아들 문성근을 먼저 떠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문익환 목사의 삶과 통일, 민주의 열망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직도 북핵문제와 주한미군 문제 등 통일로 가는 길에 적지 않은 장애물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년 간의 꿈 같은 대변혁처럼 앞으로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적 같은 일들이 조국의 앞길에 펼쳐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책은 우리에게 반민주와 반통일 세력의 실체를 직시하게 해주고, 통일을 위한 정서를 제시해줄 것이다.
10년 전, 남한 사회는 통일을 위해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화해 분위기를 만들어낸 그를 감옥에 보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전염되어 면면히 세포번식을 해오고 있다. 그렇게 문익환 목사의 꿈은 죽지 않고 살아나 조국통일의 길목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목사, 문익환
미국이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힘은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목사들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교회와 학교를 제일 먼저 세운 개척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폈다.
필자는 그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학살과 피부색으로 인종을 차별하는 노예정책, 결투라는 이름으로 살인이 인정되던 서부시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목사들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한쪽 면만을 부각시키는 편향적인 관점의 설교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적지 않은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논리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실망했다. 한국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 지나친 순종을 강조하며 말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목사 문익환의 종교관은 이러한 관점과는 다르다.
“’기독교는 아편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중독증에 걸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문익환 목사는 지나친 기복신앙은 집단이기주의, 가족이기주의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꿈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부자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소극적인 사랑’보다 불의한 세력에 맞서 정의를 구현하려는 ‘적극적인 사랑’을 내세웠다. 또 성서 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서 독일 나치스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에 가담해서 싸우다가 사형당한 독일의 젊은 목사 본회퍼의 기독교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그는 한국인이 질곡의 역사를 가진 히브리인과 비슷하다고 믿고, 민중의 해방과 민주의 실천에 앞장선 목회자였다. 그의 하나님은 ‘부자와 권력을 가진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억눌린 민중의 하나님’이었다.
늦은 봄날에 일어선 민주투사, 문익환 선생
1975년 여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서슴지 않았던 장준하가 약사봉 등산길에서 실족사했다. 이 사건은 문익환 목사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광복군 간부 출신의 장준하가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에게 살해되었다고 문 목사는 생각했다.
“한 사람은 민족의식을 일찍부터 깨우친 광복군 출신이요. 한 사람은 출세욕에 불타는 일본군 장교였으니, 장준하는 박정희의 윤리적 약점을 절대로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의 궤적은 장준하가 말하는 틀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이어졌다. 장준하가 용서할 수 없는 점은 기회주의적 처신 때문에 역사의식이 형성될 턱이 없는 자가 감히 위정자를 자처하고 나선다는 점이었다.”
장준하의 죽음은 의무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장준하 선생 장례식에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또 다른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조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문익환 목사였다. 기자로서 이런저런 현장을 많이 보고 섬뜩한 일도 겪어보았지만 서슬 퍼런 유신독재의 괴수를 향해 그렇게 직격탄을 날리는 소리를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 얼굴과 목소리는 기독교회관 강당 뒷자리의 그 부드럽고 유순한 모습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김종철, <늦봄의 한울과 한마음>)
1976년 3.1 구국선언을 시작으로 그의 새로운 인생의 막은 오른다. 그는 고 장준하 선생을 대신해서 민주투쟁의 선봉장을 자임했고, 여섯번 수감되어 134개월 동안 죄수복을 입어야 했다. 숱한 위기와 고난의 세월이 있었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평전을 읽으며 그가 감정에 충실하고 정서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서야말로 그의 종교와 함께 그를 움직이는 힘이었을 것이다.
“이제 지면도 다 돼가는 것 같아 내게 필요한 걸 적죠. 제일 필요한 건 당신, 꿈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언제나 오시오.”
감옥에서 아내 박용길 여사에게 보냈다는 편지처럼 그는 서정적이면서도 투쟁심에 넘치는, 균형 잡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은 그의 인생을 한층 더 빛나게 해주었다.
1980년대 12.12 군사 내란과 광주민주화 항쟁 6.29 선언, 북한 방문… 그 역사의 현장에 문익환 목사가 있었다. 6.29 선언의 결과물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지만 야당 대통령 후보의 단일화 실패와 부정선거로 인해 결국 재야는 군사정권에 패배한다. 재야의 사령탑이었던 민통련 의장 문익환은 그 참혹한 패배 앞에서도 다시 일어섰다. 다시 일어섰고 신명나게 ‘죽을 자리’를 찾아 나섰다.
문익환 목사 잠들다
“추운 겨울밤이었어요. 9시 뉴스를 통해 목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아나운서의 냉정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9시 뉴스가 평소 거짓말을 잘해 왔듯이 저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왜 그렇게 차가운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메마르게 읽어내려 갈 수 있는 건지, 저는 그날 이후부터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임수경 <목사님!>)
1994년 1월 18일, 문익환 목사가 잠들었다. 그는 위대한 중립화 통일론자였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길을 가려고 했던 게 아니라 좌와 우가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꿈 꾸었던 문 목사가 잠들었다.
저자 김형수는 이 평전을 쓰면서 '인간 문익환'의 일생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까지 꼼꼼하게 모자이크 해놓았다. 그야말로 그가 살았던 시대는 격동의 시대였고, 그는 그 시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