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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주는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가져온 세곡이 집결되어 한양까지 운송되는 곳이었다. 가흥창으로 불린 이곳의 조창에서 출발한 여러 척의 세곡선은 남한강 수로를 통해 260리에 이르는 한양의 용산창으로 이동되었다. 원칙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세곡선은 약간의 여비를 받고 사람을 실어 가기도 했는데 백위길은 포교의 신분으로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거 당신들은 곤란하오."

새벽부터 조창에서는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백위길이 가서 보니 온천에서 본 스님과 동자승, 그리고 사내였다.

"이 사람이 다리를 다쳐 그러니 편의를 봐 주십시오. 여비는 톡톡히 쳐 드리겠습니다."

스님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조창을 지키는 병졸은 완강히 손사래를 쳤다. 백위길은 다가가 통부를 꺼내들어 포교의 신분을 밝힌 후 그들을 배 안으로 들여보냈다.

"감사하외다. 그러고 보니 한양의 포교이셨구려. 소승의 미천한 법명은 혜천이옵고 이 아이의 이름은 끔적이라고 합니다."

다리를 다친 사내는 깊이 고개를 숙여 백위길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양에서 온 포교 백위길이라 합니다. 먼저 배에 오르시죠."

혜천 스님과 동자승, 그리고 끔적이는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백위길은 혜천 스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시는지요?"

"한양 가까이까지 가려 합니다."

"무슨 연유로요?"

"……중놈이 가는 일이 뭐 연유가 있겠습니까. 그저 유랑이나 다니는 것이지요."

백위길은 선뜻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리를 저는 젊은이와 동자승까지 데리고 무슨 유랑을 떠난단 말인가.

세곡 선단은 며칠간을 느릿느릿 흘러가며 어느덧 경기도까지 다다랐다. 그 동안 백위길은 세곡선의 동태를 살펴보았지만 이상한 낌새는 눈치 챌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이 내가 포교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조심하는 겐가?'

별 탈 없이 가던 세곡선단에 문제가 생긴 것은 백위길이 무료한 배 위의 생활에 지쳐갈 때 즈음이었다.

"배가 가라앉는다!"

이른 새벽, 깊이 잠들어 있던 백위길은 선원들의 고함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서 배 위로 뛰쳐나갔다. 백위길로서는 다행히도 가라앉는 다는 배는 제일 후미에 따라오던 세곡선이었고 배에 탄 사람들은 이미 나룻배로 옮겨 타 빠져 나오고 있었다.

"허, 저 아까운 쌀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그나마 배에 탄 이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백위길은 다시 잠을 청하려 선실로 내려갔으나 그 때 옆에 있던 혜천 스님의 말이 귓전을 때렸다.

"쌀은 건져 올리면 될 터인데 왜들 이리 갈 길만 서두르는고?"

'그 말이 맞다! 혹시….'

백위길은 쳐들어가듯 선단의 책임자인 모영하가 있는 선실로 찾아갔다.

"보시오. 지금 여기 배를 세우고 쌀을 건져 올리시오."

"뭐라고 했소?"

모영하는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쓰며 백위길을 쳐다보았다.

"저 쌀은 백성들이 피땀 흘려 바친 나라의 재물이외다. 응당 배를 멈춰 건져 올려야 할 것 아니오?"

그 말에 모영하는 코웃음을 치며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는 듯 백위길에게 면박을 주었다.

"이보시오. 난 정해진 기일 내에 한양까지 세곡을 실어다 줘야할 뿐이오. 여기서 지체할 겨를이 없단 말이오."

너무나 무책임한 모영하의 말에 백위길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럼 장부와 차이가 나는 세곡은 어찌할 것이오?"

모영하는 백위길을 아래 위로 스윽 훑어 보더니 등뒤에 있던 궤짝을 열어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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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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