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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마다 역사가 있다. 만년필로 디자인이나 폼 내려고 품에 하나씩 끼고 있지 말고 제품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더 좋다. 그 처음으로 워터맨 만년필을 살펴 보자.

워터맨 만년필을 만든 루이스 에디슨 워터맨이 태어난 때는 1837년. 그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공부라고는 거의 못했다. 나이 16세에 가족과 함께 보따리를 싸서 시골 구석인 일리노이로 이주했다. 워터맨은 어린 시절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목공 노릇으로 잔뼈가 굵었다. 한여름에는 일하고 한겨울에는 공부를 하는 노력하는 젊은이였다. 그래도 공부를 한 게 있어서 출판사의 에이전트, 속기교사를 거쳐 나중에는 보험 판매원이 되었다. 1880년 초엽에 워터맨은 뉴욕에서 생명보험을 팔러 다녔는데 이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먹고 살기도 어려워 보험 권유도 힘들었으며 가는 곳마다 경쟁자 천지였다. 계약은 계약서에 잉크로 서명을 해야만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던 중 오늘날 만년필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 생겼다. 워터맨이 고객을 만나 중요한 서명을 받을 일이 있었는데 펜 때문에 일이 망치고 만 것이다. 계약서에 잉크가 쏟아지면서 기재 항목을 다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워터맨은 급하게 새 문서를 준비했지만, 그의 고객은 그만큼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일은 워터맨에게는 불행이었다. 하지만 워터맨이 제대로 된 만년필을 만들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 그에게 닥친 첫번째 과제는 잉크 흐름을 제대로 하는 일이었다. 이 일로 그는 보험회사 일을 때려치우고 만년필 세계로 진입한다.

그는 뉴욕시 플톤가 담뱃가게의 주방 싱크대에서 첫해에 200개의 만년필을 만들었다. 그는 광고판에 이렇게 썼다. "워터맨이 이상적인 만년필- 5년 동안 품질 보장." 만년필이 아니라 5년필이었던 셈이다. 그는 모든 제품을 사가는 고객에게 보증서를 주었다.

다음 해에는 그는 생산량을 500개로 늘렸다.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고, 단단한 고무를 이용하여 제품을 연마했다. 워터맨은 큰 욕심이 없었다. 자기 일을 크게 키우기보다 고객들을 친구 삼으며 고객들의 주소와 이름을 관리했다. 그렇게 버는 푼돈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길이 없었다.

만년필 만들기를 한지 세번째 되던 해. 출판업자 이티 하워드가 이런 제안을 했다. "이름 주소 관리하고 품질 보장만 하다가는 굶어죽네. 발행 부수 30만부 되는 이름난 잡지에다 광고를 내게." 워터맨은 광고료 62달러 52센트를 꿔서 광고를 냈다.

광고의 반응은 좋았다. 전국에서 주문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공장을 주방 싱크대에서 마당으로 옮길 판이었다. 펜만 쓰다가 만년필이라니 마치 요즘 휴대폰만큼 기발한 제품이었다. 워터맨은 값비싼 뉴욕 브로드웨이 6층 건물로 기세등등하게 입성을 했다.

한해에 천개씩을 팔던 오년필이 워터맨이 죽던 1901년에는 하루에 천개씩을 팔려 나갔다. 워터맨은 뛰어난 경영 감각과 연구로 1901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35만개나 되는 큰 기업으로 성장한다. 1905년에는 최초로 클립이 달린 만년필을 내놓고 서유럽 시장에 진출했다. 그로부터 70여년 지난 1972년에는 라이프니치 박람회에서 워터맨 제품 중 콩코드 모델은 금메달을 받았다.

워터맨의 펜촉은 대부분 수공으로 제조된 18K이나 23.5K 금코팅을 사용한 것이다. 18K 금의 코팅을 시작하여 섬세한 제조 공정을 15번이나 거친 뒤 하나의 펜촉으로 완성된다. 펜 장식은 23.6K 금으로 도금되어 있다. 또한 수백가지의 색채를 창조하는 현대적 래커 도장이 가능하다. 고급 라인의 펜은 7번 래커로 코팅되며 건조, 연마, 색의 명도 조절 등의 최종 검사를 마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유명한 뮤지컬 스타 프레드 이스티어, 미국과 파리 간 단독 무착륙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 등은 워터맨의 열렬한 애용자 중의 한 사람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많은 군인들이 참호 안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워터맨으로 썼다. 전쟁이 끝난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평화협정은 워터맨으로 서명됐는데 이 때의 서명자는 영국 수상 대비드 로이드 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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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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