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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의 덕수궁 대한문은 '수리중'이다. 이번의 보수공사는 6월 1일부터 금년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그 사이에 대한문은 폐쇄되고, 공사기간에는 서울시의회 쪽으로 난 소방문이 임시출입구로 사용된다.
2004년 6월의 덕수궁 대한문은 '수리중'이다. 이번의 보수공사는 6월 1일부터 금년말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그 사이에 대한문은 폐쇄되고, 공사기간에는 서울시의회 쪽으로 난 소방문이 임시출입구로 사용된다. ⓒ 이순우
이것만으로는 왜 이름을 고쳤으며, 그것이 또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다. 그러한지라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뀐 까닭에 대해서는 공연스레 이러쿵저러쿵 하는 얘기들이 참 많다.

누구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황제를 빗대어 '큰(大) 놈(漢)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고쳤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갓을 쓴 여자(安)' 즉 배정자(裵貞子)가 궁궐을 들락거리는 꼴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남자를 뜻하는 글자(漢)로 바꿨다고도 하고, 심지어 중화사상에 치우친 탓에 위대한 중국을 뜻하는 글자(大漢)를 집어넣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간혹 있는 모양이다. 대한문의 현판을 쓴 사람 또한 남정철(南廷哲)이 아니라 유한익(劉漢翼)이라고 적어놓은 글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1995년에는 "일제가 왜곡한 덕수궁과 대한문의 이름을 민족정기 회복차원에서 각각 경운궁과 대안문으로 환원해 달라"는 청원이 문화재위원회에 제출되었으나, "글자풀이에 매달리는 인식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사료발굴 등 명칭을 변경할 합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받아들이는 것이 옳겠다"는 취지로 검토안건이 기각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무엇이 터무니없는 소리일까?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얘기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일까?

일일이 그 연원을 다 찾아낼 수가 없으니 애당초 명쾌한 결론을 얻어내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에 관한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록들을 죽 훑어보면 거기에도 나름의 변화가 있어왔던 흔적은 또렷하다.

의정부참찬 민병석의 글씨인 '대안문'의 편액(위)은 1899년 3월에 처음 내걸렸다. 지금 이 편액은 궁중유물전시관의 소장품(유물번호 674)으로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대한문에 매달린 편액(아래)은 궁내부특진관 남정철의 글씨이며, 1906년 5월에 등장했다. 대한문 상량문에 따르면, 대한문은 '큰 하늘'의 뜻을 담고 있다.
의정부참찬 민병석의 글씨인 '대안문'의 편액(위)은 1899년 3월에 처음 내걸렸다. 지금 이 편액은 궁중유물전시관의 소장품(유물번호 674)으로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대한문에 매달린 편액(아래)은 궁내부특진관 남정철의 글씨이며, 1906년 5월에 등장했다. 대한문 상량문에 따르면, 대한문은 '큰 하늘'의 뜻을 담고 있다. ⓒ 이순우
가령 일본인들이 정리한 <경성오백년(1926)>, <경성의 광화(1926)>, <경성과 인천(1929)> 등에는 한결같이 '갓을 쓴 여인… 운운'하는 내용으로 그 연유를 설명하고 있으며, 또 조선 사람들이 쓴 것이라 할지라도 <별건곤> 1929년 9월호, <조광> 1937년 11월호 등에도 역시 '갓을 쓴 여인… 운운'으로 대안문의 이름을 고친 까닭을 풀이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만 이들 잡지에는 그 주인공으로 '배정자'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 약간 달랐다.

그러니까 대안문과 대한문을 일컬어 '갓 쓴 여자'와 '사나이 한'이라는 식으로 인식한 것은 대략 그 즈음에 시작된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은 대한문이 등장한 때와 상당한 시차가 있다는 점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또 사실관계가 정말 그러했던 것인지는 엄밀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총독부 편집과장을 거쳐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오다 세이고(小田省吾)는 이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대안문의 이름을 바뀐 배경을 '짐작'했다. <조선> 1934년 11월호를 통해 그가 정리한 '덕수궁 약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생각건대 당시 한국은 이미 지나(支那)와의 종속관계를 탈피했고 새롭게 도약하는 제국이 되어 바로 한실(漢室)의 흥륭을 자임하고 있었다. 그 점은 황제 즉위의 조칙 가운데 '주왕이 일어나니 예가 시작되매 성강지세(成康之世)가 정해졌고, 한제가 창업하여 그 터를 닦으매 문경지년(文景之年)으로 칭하여 졌도다' 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대한'의 두 글자가 본문(本門)의 명칭으로 채택된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하지만 시중에 떠도는 이런저런 속설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전제하에 제시했던 오다의 설명 역시 딱히 무슨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그렇게 풀이했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거기에 아무런 사료를 제시하지 못하기는 그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으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1912년에 황토현(광화문네거리)에서 대한문 앞까지 이어지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덕수궁 앞쪽의 담장은 뒤로 크게 물러섰으나, 대한문은 간신히 제자리를 지켰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으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1912년에 황토현(광화문네거리)에서 대한문 앞까지 이어지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덕수궁 앞쪽의 담장은 뒤로 크게 물러섰으나, 대한문은 간신히 제자리를 지켰다.
<경성부사> 제1권(1934)에 수록된 덕수궁 일대의 모습이며, 왼쪽 끝에 대한문이 보인다. 1927년 5월에는 덕수궁의 해체와 관련하여 도로전면의 구역을 불하하는 동시에 대한문도 뒤로 30칸을 물러서기로 한다는 계획이 구체화된 적이 있었으나, 용케도 대한문은 원래의 위치를 지켰다.
<경성부사> 제1권(1934)에 수록된 덕수궁 일대의 모습이며, 왼쪽 끝에 대한문이 보인다. 1927년 5월에는 덕수궁의 해체와 관련하여 도로전면의 구역을 불하하는 동시에 대한문도 뒤로 30칸을 물러서기로 한다는 계획이 구체화된 적이 있었으나, 용케도 대한문은 원래의 위치를 지켰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바뀐 사연을 담은 구절이 들어있다.

"(1906년 6월) 대안문을 고쳐 대한문으로 하고, 이를 경운궁의 정문으로 삼다. 전비서승(前秘書丞) 유시만(柳時萬)은 겸암 운용의 사손(祀孫)이라. 운용의 비결을 얻어 그 삼백 년 된 묘소를 천장한다고 하고 또 거짓 참서를 만들어 몰래 무덤 속에 묻었다가 여기에서 나왔다고 은밀히 상(上)께 바쳤다.

이를 대략 말하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安東)의 신양면(新陽面)에 천도하면 국조(國祚)가 연창(延昌)하리라. 상께서 이에 혹하여, 꿈에 그런 징조가 있었다고 핑계하여 말하되 즉시 문호(門號)를 고치며 많은 돈을 내어 시만에게 주어 행궁(行宮)을 짓거라 하셨다. 시만은 자루에 담아 돌아와 졸지에 부호가 되었으나, 상 또한 이를 묻지 않으시도다."


'거짓 참서… 운운' 하는 내용인지라 선뜻 받아들이기가 껄끄럽지만 어쨌거나 이것은 대안문의 이름을 고친 내막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셈이다. 특히 <매천야록>에 담겨진 이 얘기는 대한문의 편액이 고쳐진 때와 아무런 시차 없이 채록된 것이라는 점도 좀 눈여겨볼 대목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적어도 그 당시에 그러한 풍설이 세상에 나돌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매천야록>에 수록된 상당수의 기록이란 것들이 시골에 묻혀 살던 황현 선생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이라기보다는 대개 서울에서 발간된 신문의 기사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거나 알음알음으로 전해들은 얘기들을 채록한 경우가 허다했던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듯하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러한 일이 정말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혹여 힘없는 제국의 황제는 그렇게나마 망국의 운명을 잠시 되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것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믿을만한 기록은 정말 없는 것일까? 그리고 대한문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1968년에 이르러 대한문은 도로 한가운데로 밀려난 몰골이 되고 말았다. 개발독재시대의 불도저 행정에 밀려 태평로에 접한 덕수궁 담장이 다시 뒤로 한껏 물러난 탓이었다. 대한문은 그렇게 2년여를 버티다 결국 1970년 1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고 말았다.
1968년에 이르러 대한문은 도로 한가운데로 밀려난 몰골이 되고 말았다. 개발독재시대의 불도저 행정에 밀려 태평로에 접한 덕수궁 담장이 다시 뒤로 한껏 물러난 탓이었다. 대한문은 그렇게 2년여를 버티다 결국 1970년 12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고 말았다.
이에 관한 해답은 바로 대한문의 상량문에 들어 있었다. 1907년 1월에 편찬이 완료되었다는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이근명이 지은 대한문의 상량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대한문'이라는 이름의 뜻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풀이했다.

"한양은 띠를 두른 형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 한방(韓邦)의 문호(門戶)의 땅이다. 열수(冽水)가 남쪽을 지나가고, 태악(太岳)이 북쪽에 우뚝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하가 표리를 이루고, 천부(天府)가 열려 들이 되었으며, 중심(衆心)이 굳게 뭉쳐서 성을 이루었다. 황제 폐하께서 명당(明堂)에 앉아서 만승(萬乘)의 자리에 오르시고, 환구에 제사하고 삼성(三聖)과 기사(耆社)를 좇아 지치(至治)를 이루고 있다. 단기(檀箕) 이래 수천 년의 제업에 조창하여 송나라와 명나라에 직접 닿았다.

황제는 천명을 받아 유신(維新)을 도모하여 법전(法典)인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시고, 다시 대한정문(大漢正門)을 세우셨다. 대한(大漢)은 소한(雨아래肖漢)과 운한(雲漢)의 뜻을 취한 것이니, 덕이 호창에 합하고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온다. 대한문의 동쪽은 아침햇살이 처마 위를 청홍으로 물들인다. 대한문의 북쪽은 솟아오른 삼봉산(三峰山)이 수색(秀色)을 보내고, 대한문 아래는 마을이 천문(天門)을 열고 사야(四野)로 뻗었다."


여기에 나오는 '소한'이니 '운한'이니 하는 것이 모두 '하늘'의 의미라 하였으니, 대한은 결국 '큰 하늘'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대개의 속설들이 그러하듯이 '대한문'을 둘러싸고 난무했던 이런저런 얘기들 역시 그다지 깊이 담아둘 만한 것은 되지 못할 듯싶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러한 해석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나 감흥이나 정서 정도는 마땅히 헤아려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애당초 대한문이 등장했던 시절에 비해 그 몰골이 잔뜩 오그라진 처지인지라, 지금의 덕수궁은 이래저래 그 '큰 하늘'을 다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벅찬 시대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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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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