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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D씨
지하철의 D씨 ⓒ 성남훈
올해 서른 살인 D씨. 다행히 우리 정부는 그를 난민으로 인정해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그 보호는 단지 강제 송환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보호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D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해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55주년 기념식장에서다. 국가인권위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서 그는 세계인권선언 30조 중 제14조를 낭독했다.

"제14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피난할 권리가 있다."

아침부터 5월의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그를 만나기 위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는 최근 민변과 함께 난민 인정자나 난민 신청자를 대상으로 한 난민 생활 실태조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우산을 털며 민변 사무실에 나타난 그는 허름한 재킷과 주름이 흐려진 바지 차림에 큰 가방을 메고 있었다.

D씨는 한국 생활이 올해로 8년째다. 얼마 전까지 마음씨 좋은 사장님과 함께 일하다가 그 공장마저 문을 닫은 이후 현재는 실직 상태다. 지금 사는 집도 그 사장이 잠시 머물게해 준 곳일 뿐 D씨에게는 아무 권한이 없다. 그에게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은 고향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만큼 고통스런 현실의 한 자락이다.

D씨의 조국은 80여 개 민족들이 오랜 역사적 전통을 쌓으면서 살아온 다민족 국가다. 근대에는 유럽 열강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열악한 자연 환경으로 인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는데 군부 쿠데타와 정쟁이 끊이지 않게 되면서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그러던 중에 D씨가 속해 있는 민족 내에서 독립 운동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D씨의 민족이 독립한다는 것은 사실상 나라의 붕괴와 분열을 의미했다. 정부 역시 민감하게 대응했다.

"처음에는 저 홀로 선교 활동을 다녔어요. 그런데 정부는 제가 선교 활동을 가장한 독립 운동을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목사님 밑에서 활동했는데, 그래도 의심을 해서 저를 몇 번씩 잡아 가두었습니다."

강제 송환의 두려움에 난민 신청도 망설여

거리의 D씨
거리의 D씨 ⓒ 성남훈
1997년, 그는 또 잡혀갔고 다시 풀려났다. 그를 아끼던 분이 보다 못해 그에게 탈출을 제안했다. 다시 잡혀간다면 그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분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탔고 어찌어찌해서 들어온 땅이 바로 한국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먹고 사는 게 막막했어요. 말도 안 통하죠. 한국말을 전혀 몰랐는데, 어쩌다가 이태원까지 왔어요. 당시 돈으로 100불을 주고 직업을 소개받았죠. 김포 근방에서 묘목을 심고 옮기는 일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자주 나가던 교회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가 그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난민 신청을 제안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난민협약에 가입되어 있다고 해도 난민을 인정한 적이 없어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었고, 오히려 불법체류 노동자로 몰려 강제 송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2000년 말에 난민 신청을 했다. 운 좋게도 그에 대한 난민 심사는 1년을 넘기지 않고 2001년 2월경에 통과되어 난민임을 인정 받았다.

"정말 기뻤어요. 특히 강제 송환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맘 편하게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강제 송환되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는 꿈 중에서도 강제 송환되는 꿈이 가장 무서웠다고 한다.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이 있을 때마다 꼭꼭 숨어 지냈던 이유도 단지 단속을 피하기 위해라기보다 강제 송환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이제 그런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기쁨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협약 난민이 된 D씨에게 언론의 취재 세례가 잇달았다. 하지만 D씨는 자신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 가족들이 입을 정치적 보복이나 피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집요했다. 그가 다니는 교회까지 찾아왔고 집으로도 수없이 전화를 했다. 결국 그에 대한 보도가 언론에 나갔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가족은 다른 곳으로 피신해 죽은 듯 숨어 살아야 했다. 그후 그의 동생마저 탈출해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하게 됐다.

"동생이 지금 양주에서 일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입국하고 난민 신청을 했죠. 주말에만 만나는데 많이 힘들어해요. 그냥 조용히 고향에 있었으면 잘 살았을 텐데…."

아내와 딸 입국 예정…집도 직장도 없어 막막

대화하는 D씨
대화하는 D씨 ⓒ 성남훈
그는 영어에 능통하고 직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성인 문맹률 65%, 남자의 중등학교 진학률 11%인 그의 나라에서 직업전문학교 졸업은 고학력에 속한다.

"동네 교회의 목사님이 영어 과외일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어요. 그런 거라면 잘 할 수 있어요. 보시다시피 한국어도 이젠 잘 하거든요. 한국 정부가 교육비를 지원해 준다면 대학에 다니고 싶어요. 사회복지나 사회학을 공부해 나중에 조국에 돌아가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난민에 대해 어떤 교육도 지원하고 있지 않다. 한국어 공부도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는 한국어를 읽고 쓰기 위해 스스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자유로운 의사 소통이 가능하며 쓰고 읽는 것도 보통의 수준 이상으로 구사하게 됐다.

"아내를 만나러 가기 위해 돈을 아끼고 있어요.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와서 살려고 하는데 막막해요. 지금은 집도 없고 직장도 없어요."

그와 아내는 고향의 교회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 양가 부모도 환영했다. 그러나 그가 조국을 떠나 난민 신세가 되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내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D씨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D씨와의 사랑을 지켜 냈다. 우여곡절 끝에 D씨는 2002년 노동비자로 이탈리아에 머물던 아내와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현재 그의 아내는 임신중이다. 7월이면 딸이 태어난다.

"딸 이름은 이미 지었어요. '뵈뵈'예요. 뵈뵈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탈리아에 있는 아내가 지금 몸이 안 좋아요. 혈압이 높아서 병원에 입원 중이죠. 그런 아내를 데리고 오면 당장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으니 병원비는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요. 또 딸아이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해요."

'안전 비호'를 넘어 권리까지

외국의 한 난민캠프 모습
외국의 한 난민캠프 모습 ⓒ 성남훈
우리나라에서 난민의 직계 가족에 대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은 유례도 없을 뿐더러 법률과 제도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의료보험에 대해서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홈페이지에는 난민의 보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난민은 안전하게 비호받을 권리가 있다. 국제적 보호란 신체적 안전 이상의 의미를 포함한다. …(중략)… 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동등한 경제적·사회적인 권리 및 의료 혜택을 받을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 성인에게는 일할 권리가, 아동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한편에서는 D씨에게 이탈리아에서 살 것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다. 난민에 대한 지원이 열악한 한국보다 이방인에게 개방적인 이탈리아가 낫지 않겠냐는 얘기다. 그러나 D씨는 고향 땅에서 사는 게 아니라면 세상 어디를 가도 어차피 재정착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돌아다니면 돈만 쓰게 돼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며 7년여 동안 살아온 한국. 생활하는 데 팍팍하기만 했던 이 땅이 그래도 마음에 드는 이유는 바로 한국 사람들의 정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물론 난민 인정을 받았을 때였어요. 지금도 저를 난민으로 인정해 준 한국 정부에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난민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

그의 집은 포천에 있다. 5~6평 정도 되는 방에 허름한 침대와 장롱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꼭지와 싱크대가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을 개조해 만든 방 같다. 앉을 자리가 없어 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방마저도 이탈리아에 갔다 오면 없어진다.

"난민 인정 심사를 기다리는 분들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해요. 진실은 밝혀지는 것이니까, 진실을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 해요. 난민 인정을 기다리는 게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라는 거 잘 알아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잘 이겨 내고 견뎌냈으면 좋겠어요."

난민들은 꿈을 좇아 대한민국에 온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이 땅을 찾아왔다. 위험 앞에 노출된 난민에 대한 지원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어야 하지 않을까. 불과 50여년 전 우리도 난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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