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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 스님
일송 스님 ⓒ 전영준
스님과 나눈 이야기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한 마디 툭 던지는 말에 담긴 웅숭 깊은 뜻을 얼른 알아차리기도 어렵거니와 자칫 그 뜻을 구부러트릴까 저어되기도 한다. 일송 스님과의 만남을 적는 것도 그렇다. 꽤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나 이를 글로 옮기려니 막막하다.

이를테면 만나자마자 건네 준 이녁의 시집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의 속표지에 손수 써준 '龍床巨然(용상거연)'이라는 글을 풀이하는 것도 그렇다.

“큰 사람은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나 할까….”

3년에 걸쳐 천일기도를 끝내고 목탁을 놓은 날 새벽, 문득 떠오른 글귀라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더 깊은 뜻이 있으려니 싶다.

속인은 어쩔 수 없이 스님의 과거가 궁금타

“일송 스님. 통도사 극락암에서 명정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인도 델리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통도사 대웅전 적멸보궁에서 3년 기도 정진 중이다.”

스님의 시집에는 작가를 이렇게 짧게 소개하고 있다. 책이 나온 때가 2003년 5월이니 지금 이 시집을 냈다면 '3년 기도 정진 중'이라는 대목도 빠질 터라 작가의 소개는 한결 더 단출했겠다 싶다.

그래, 어쩌면 이 단출함이 스님의 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세수 마흔 하나. 살아 온 날이 짧지 아니한데 지난 온 날들의 인연을 다 들추어 내자면 그 또한 간단치 않으련만, 세속을 등지고 애오라지 구도의 길을 걷는 그에게 지난 인연이야 한낱 누더기에 다름 아니리라. 그래도 속인은 어쩔 수 없이 스님의 과거가 궁금타.

스님은 일찍이 대학(한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문학 소년이었던 청소년 시절에는 문학 동인 활동도 활발히 벌였고, 성남예총 산하 '한산문학회' 회원으로 시작(詩作)에도 열심이었다. 고등학교 때 쓴 시가 300여편이었다니 그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알 만하겠다. 나중에 승려가 되고난 뒤인 88년에는 고은 시인의 추천으로 <불교문학>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까지 했다.

당시 고은 선생은 일송이 승려보다는 문학인이 되기를 기대했다니 고은이 보기에 그의 문재가 꽤나 특출했던가 보다. 그러나 그는 수도에 정진하고부터는 시를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하였다함이 옳으리라. 그래서 지난해에 낸 시집의 시들도 몇 편을 빼고는 대부분 십년 훨씬 전의 작품들이란다.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출가를 하였을까?

“부처님도 팔자에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요….”

그 때가 스무 살 때, 한신대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영등포 역전에서 집이 있는 성남을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북쪽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때, 홀연히 자신의 다섯 살 적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 다섯 살 봄날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다투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집을 나와 냇가를 거닐면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지요. ‘나는 부모님처럼 살지 못하리라. 나는 중이 되어야 겠구나’라고. 그때만 해도 중을 본 적도 없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지요. 그러면서 산을 바라보았더니 그 산의 7, 8부 능선쯤에 웬 남자가 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또 생각을 했지요.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고….”

그래, 운명이었구나. 천생 중이 될 운명이었구나

그로부터 15년, 그는 그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영등포 역전에서 북쪽 하늘을 바라 본 그 본 순간에 불현듯 15년 전의 그날이 그림처럼 자신의 뇌리에 펼쳐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길로 곧장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그래, 운명이었구나. 천생 중이 될 운명이었구나 싶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은 무엇이었으며, 굳이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 까닭은 무엇인가?

“교류를 나누는 신부님과 수녀님들도 그 점을 궁금해 하지요. 그러면 나는 되레 반문을 합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개종을 하십니까?’라고.”

진리에서 진리로 개종하는 법이 있을 수 없듯이 그는 자신이 신학도에서 승려가 되었다 하여 그것을 굳이 개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을 공부한 것도 그에게는 진리의 탐구요, 승려로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역시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승려 일송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일 뿐, 나눔이 없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것이 진리에 의해서, 진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니, 나와 네가 없고, 불법과 진리가 다르지 아니하고 도가 또한 하나이다.”

여기서 일송 스님의 시집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의 표제시를 음미해 보자.

일송 스님 시집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일송 스님 시집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 ⓒ 전영준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
누가 달만의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둠의 그림자를 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을까
달이 전부인 세상에 살며
달이 생명인 고향에 깃들 수 있을까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
누가 그만의 소중한 그리움이 될 수 있을까
빛의 그림자를 안고
늘 새롭게 출렁일 수 있을까
달이 운명인 세상에 살며
달이 자유인 그 곳에 갈 수 있을까

아,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전문

승려 시인의 달은 속인의 달과 다르다. 그의 달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달의 연인이란 진정한 수행자, 곧 바로차이나, 즉 참 나이며 마침내 다다라야 할 구도의 대상인 것이다. 앞으로 홀가분하게 여행하면서 글을 쓸까 싶다는 스님의 다음 글들이 자못 기다려진다.

누가 달의 연인이 될 수 있을까

일송 지음, 한솔의학서적(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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