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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 많은 중2, 30년 후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나는 꿈 많은 중2, 30년 후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 윤지형
선생 노릇으로 밥 벌어먹은 지도 스무 해가 가까워 온다. 그간 나름대로 ‘교육의 인간화’와 ‘아이들이 행복할 권리’를 옹호하고 그것을 가로막는 유형무형의 것들과 싸워왔다고 자부도 해온 내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친 것은 지난 해 3월, 그러니까 첫째 딸 주희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내게는, 아니 우리 부부에게는 최소한의 자식 교육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는 마음껏 놀아야 한다. 그러므로 학원같은 곳에는 가능한 한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에 관해 나와 아내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모종의 감성 교육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주희가 여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 학원에 보냈다. 한편 딸애는 5, 6학년 동안 부산 KBS 어린이 합창단에서도 활동했는데 물론 우리 부부의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주희는 친구에게서 들었다며 KBS 어린이합창단에 들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원서만 한 장 구해주면 오디션 준비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고 나와 아내는 그것을 기특하게 여겼을 뿐이다.

아내는 직장 여성이면서도 2년 동안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는데 열과 성을 아끼지 않았고 주희도 제가 먼저 원한 일이라 더 그랬을 테지만 몇 번의 어려운 고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집과 학교 그리고 방송국을 오가며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우리 부부의 교육 원칙이 ‘초등학교 시절엔 마음껏 놀게 한다’였지만...

주희는 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좀 어른스러운 편이었다. 제 엄마는 애가 제 것을 너무 안 챙기는 것 같아 속이 상한다고도 했지만 그래도 선생님들로부터 적지 않게 칭찬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내가 스승의 날을 맞아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면 주희는 청소 같은 일도 솔선해서 하고 선생님 일도 곧잘 도와준다고 했다니 말이다.

초등학생 시절 눈 내린 날, 동생 소희와 함께
초등학생 시절 눈 내린 날, 동생 소희와 함께 ⓒ 윤지형
‘그렇지. 그렇게 크면 되는 거야.’
나와 아내는 빙그레 웃으며, 늦어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학원 종합반 같은 곳에 아이를 보내 중학교에 대비해야 한다는 다른 부모들의 조급증과 어리석음을 동정하곤 했다.

'아이를 어린 시절부터 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 집어넣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부모가 바른 삶을 살면 아이들의 미래도 밝게 열리게 마련일텐데. 아이들을 방치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부모의 욕심이 자식의 소질이나 소망을 압도해 아이의 바른 성장과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거나 억압하는 것 아니겠어?’

우리 부부는 내 아이만은 학과 성적이나 등수로 그 인격이나 능력을 재단하진 않으리라, 점수 1, 2점 더 따게 하려고 안달복달하면서 키우지는 않으리라, 내심 다짐하곤 했다.

주희가 첫 시험에서 15등을 하자, 나와 아내는 경악을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딸아이가 입학하게 된 학교에서도 여느 중학교와 마찬가지로 입학식 전인 2월 말에 ‘반 편성 고사’를 실시했다. 주희가 그 시험에서 34명 중 15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나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음이 틀림없다. 근데 사실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태’였다. 남들이 다 가는 학원에 아이를 보내지 않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정도는 대충 잘한 편이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철렁 내려앉은 내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채 반문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 주희가 15등을 하다니?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우선 나는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다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나 자신에 대해 놀랐다. 왜냐하면, 이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내 딸이 15등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숨겨놓은 나의 어떤 치부가 한번에 햇살 아래로 드러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공부를 하든 말든 이쁘게만 보이던 주희가 미워지고...

'등수'가 없는 통지표엔 ......
'등수'가 없는 통지표엔 ...... ⓒ 윤지형
'내가 이 정도밖엔 안 되었단 말인가? 정말 한심하고 한심한 노릇이로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또 다른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사태는 호락호락 정리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더욱 당혹케 만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공부를 하든 놀든 이쁘게만 보이던 주희가 갑자기 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등수 하나 때문에 아이를 미워하게 되다니 내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내용으로 시험을 치르는 반 편성 고사의 등수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중론이었으니, 나의 충격과 미운 감정은 더욱 난데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성이 아무리 나를 나무라고 설득해도 내 마음은 따로 노는 데 있었다.

주희는 중학교에 올라가면 연극반에 들겠다고 했었고, 나는 그걸 흔쾌히 승낙한 바였다. 아니 승낙 이전에 내가 먼저 그걸 권장했다. 그런데 ‘15등 사건’후 나와 아내의 마음은 휘청거렸다. 주희가 연극반에 드는 것에 먼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아내였다.

“공부를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연극반을 할 수 있겠니?”
나는 아내보다 좀 더 교활하게 나갔다.
“네가 연극을 하려면 연극을 안 하는 애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그건 알겠지?”

차마 연극반에 들지 말라고 윽박지르지는 못하고, 그 정도로 해두었다. 그러나 예컨대 애가 대뜸 태권도 학원을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나, 친구를 집으로 불러와 제 방에서 하루 종일 놀 때, 영화를 보고 곧장 온다고 해 놓고 귀가 시간이 늦어버릴 때, 연극 연습한다고 일요일에도 학교를 나간다거나, 방 책상이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을 때면 나는 그런 일련의 행동들을 주희의 시험 등수와 관련시키고 급기야는 미운 감정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그걸 숨기기 위해 무진 노력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KBS 방송국에서 친구 신은이와 포즈를 취한 주희
KBS 방송국에서 친구 신은이와 포즈를 취한 주희 ⓒ 윤지형
주희가 1등, 2등을 했더라면 과연 그랬을까?

아내와 내 입에서 ‘빈둥대지 말고 공부해라’, ‘네 방 청소라도 깨끗이 해라’는 등의 소리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충고를 그저 ‘잔소리’로 격하시켜 받아들이려는 포즈를 취하는 주희를 나는 내심 벼르기도 했다. 한 번만 더 무례한 태도를 보이거나 약속을 안 지키면 혼을 내 주어야겠다고….

문제는 분명했다. 만약, 주희가 반에서 1등이나 2등을 했더라면 그 모든 마음에 안 차는 일상 생활도 그저 예쁘게만 보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주희에겐 아무리 부당한 일이었다 해도 나의 그런 감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 역시.

어쨌든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주희를 제가 자신 없어 하는 수학 단과반만 보내고 다들 보낸다는 종합반은 보내지 않았다. 종합반을 가게 되면 학교 정규 수업이 파한 후 저녁밥을 먹자마자 매일 학원으로 가서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전 과목을 예습 복습시키는 강의를 듣고 밤 11시나 되어 귀가한다고 하니, 이제 겨우 중학교 1학년생인 딸을 거기에 보낸다는 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주희야. 중학교 올라오자마자 학원에 의지부터 하면 끝장이야. 스스로 예습 복습을 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같이 노력해보자.”
나는 이렇게 말했고 주희도 내 말에 수긍했으므로 우리 부부는 안심했다. 다른 이들은 턱 없는 소리라고 웃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 딸이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등수에 따라 함께 널뛰기를 한 주희를 향한 나의 애증

그런 믿음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약간의 '잔소리'나 은근한 '감시', 혹은 걱정 어린 ‘관심’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주희는 1학년 1학기 반에서 6등을 했다.

우리 부부는 내심 환호했다.
"그것 봐. 되잖아!"
그런데 2학기엔 다시 15등으로 곤두박질했다. 요컨대 주희의 등수는 6등에서 15등 사이를 널뛰기를 한 셈이었고 그러는 동안 아내와 나의 감정 역시 미움과 믿음, 미움과 칭찬의 사이에서 같이 널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2학년이 되자 주희는 종합반을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니, 다들 다니는데 혼자만 안 다니는 것 같아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고 울기까지 했으니 눈물로 호소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다른 애들은 다 학원에서 수업 내용을 먼저 배워 온단 말이야!”
주희는 ‘학교 교육 충실론자’인 내게 학원에서의 ‘선행학습 불가피론’을 펼치는 것이었다.

주희의 ‘선행학습 불가피론’에, 나의 ‘학교 교육 충실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학원에 늦을라, 가방을 매고 저녁밥을
학원에 늦을라, 가방을 매고 저녁밥을 ⓒ 윤지형
“제가 저렇게 원하니 공부하는 방법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보내 봅시다.”
아내의 말에 나는 쓴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마침내 주희는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오호 통재라! 내가 가장 답답하게 여겨온 대한민국 중고교생의 다람쥐 쳇바퀴 속으로 주희도 편입되고 만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 학원, 집으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강행군.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6년간은 그런 생활을 악착 같이 버텨내야 한다. 내 아이가 특별하기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나는 새삼 슬펐다.

“아빠, 모두가 다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학원도 없어질 테고 그럼 이런 고민은 안 해도 될 텐데, 그지?”라고 묻는 ‘순진한’ 주희에게 나는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학원이 없어진다구? 그건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어느 날 문득 무너지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지금은 학원이 문제가 아니라 갈수록 학원화 되어가는 학교가 더 큰 문제인 걸!’

이렇게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1학기 기말 시험을 치르고 나자 주희는 아이들이 잘 쓰는 말로 ‘학원을 끊겠다’고 했고 나는 한마디로 ‘좋다’고 응답했다. 실은 완전히 끊은 건 아니다.

힘은 너무 드는 데 비해 소득은 별로인 걸로 판명난 종합반은 다니지 않기로 하고 여름 방학 중에 수학 단과반 수강만을 신청하기로 주희와 나는 의견 합치를 본 것이다. 단 한 가지 내가 주희에게 받은 다짐은 있었다. 방학 동안 집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기로 할 것!

상상을 넘어선 나의 기대와 욕심

며칠 전 종업식 날 주희는 1학기 성적표를 받아왔다. 과목별 등수만 나오는 성적표라 정확한 전체 등수는 알 수 없지만 주희의 말로는 반에서 5, 6 등쯤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등수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주희를 ‘미워’할 정도의 등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사랑’할 정도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등수가 학원에 의지한 결과이며 그러기에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라는 판단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욕심과 기대가 내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사실을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넘어야 할 산은 많다지만 오늘 나는 웃는다
넘어야 할 산은 많다지만 오늘 나는 웃는다 ⓒ 윤지형
나는 그런 자신에게 처음으로 환멸을 느꼈다. 평소 부모의 과도한 욕심이야말로 아이들의 참된 행복과 인간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으며 교육 개혁의 가장 힘겨운 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글로나 행동으로 표현해온 내가 아니던가?

하지만 생각컨대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소박한 소망 혹은 마땅한 욕심은 그 누구도 함부로 나무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나도 전혀 '무죄’인지도 모른다.

'내 자식만은 공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을까?

하지만 오늘 나는 무죄이고 싶지 않다. 정녕 ‘나부터 교육 혁명’이 필요하다면 내 머릿속에서부터 내 자식은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말끔히 몰아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그게 가능한 한 일이기는 한걸까?

종합반 학원이라는 ‘목발’을 걷어치우기로 한 주희가 2학기에 들어가서는 다시 15등, 20등 신세가 안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주희를 향한 나의 애증(愛憎)의 쌍곡선은 앞으로도 현재 진행형인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그건 얼마나 무섭고 가당찮은 일인가? 여느 아이 못지 않게 낙천적이며 관용적인데다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주희라는 한 인격체를 가늠하는 핵심적 잣대로 어느 틈에 점수와 등수를 들이대고 마는 내 몰골은!

며칠 전 주희는 제 엄마에게 문득 소리쳤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 말이 무례하거나 위태롭게 들리기보다 경쾌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진 것은 그래도 내가 아직은 주희를 믿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나 자신을 의심한다. 아이의 야생적인 자유에의 갈망과 독립심을 내 잘난 '노파심'으로 숨막히게 하지는 않을까 하고. 왜냐하면 주희의 시험 성적과 등수라는 복병이 언제 또 나의 이성을 마비시킬지 모르기에!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 귀로 이런 목소리가 하나 들려온다. '5등과 15등 사이에서 딸아이에 대한 애증의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니 당신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군요. 그럼 그 밑의 아이를 둔 부모는 어쩌란 말이오?’라고.

주희가 반에서 꼴찌였다면 나는 여기에 글을 올릴 생각조차 못할 만큼 절망만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그 반대로 내내 1등만 했다고 해도 나는 이런 글을 쓸 까닭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 나는 배 부르게 보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배고프게도 보일 것이지만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나와 딸이 함께 지혜와 힘을 합쳐 앞으로 어떤 ‘인간됨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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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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