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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석탑만 남은 신계사 절터
3층석탑만 남은 신계사 절터 ⓒ 양주승
7월25일 아침9시 식사를 마치고 구룡연 관광길에 나섰다. 버스로 온정리를 출발하여 목란관 식당 앞 주차장에 내려 구룡연까지 돌아 내려오는 약4시간 코스다. 이날은 여름 장마비와 짙은 안개로 필자는 목란관 식당 앞에서 산행을 포기하고 신비의 미인송으로 쌓인 신계사(神溪寺)절터를 향했다.

신계사(神溪寺) 절터 앞 신계천 계곡에는 상류 구룡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비단폭 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계사는 신라 보운조사가 519년 창건한 고찰로서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집하였던 충절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유점사,장안사,표훈사와 함께 북에 있는 4대 사찰중의 하나였지만 한국전쟁으로 삼층석탑을 제외하고 모든 문화재가 소실됐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전 신계사 전경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기전 신계사 전경 ⓒ 양주승
전쟁으로 소실되기 전, 신계사는 대웅전, 만세루, 칠성각, 극락전 등이 있어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었다. 자연과 조화된 건축미는 금강산과 함께 우리 민족의 슬기를 전해주던 국보적 유적이었다.

사찰터 주변에는' 창터솔밭'을 비롯해 울창한 송림과 외금강의 절경을 앞 뒤, 양 옆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 대해 "지난해 작고한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유분이 뿌려진 곳"이라는 안내원의 설명이 있었다.

최근 남측의 조계종은 북측과 신계사를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불교를 통한 남과북의 교류를 통해 신계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것을 생각하니, 불신도로서 가슴이 설레었다.

신계사 절터를 애워싸고 우뚝 솟아오른 장대한 소나무들은 지금껏 보아왔던 볼품 없이 왜소하고 굽은 소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령 100년 이상의 미인송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장관을 이룬다
수령 100년 이상의 미인송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장관을 이룬다 ⓒ 양주승
수령(樹齡)이 100살에서 200살이 된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뻗어 당당히 서있는 자태는 경이로운 풍광이었다. 어느 한 소나무도 굽은 나무가 없는 그 자태가 놀라워 할 말을 잃게했다.

소나무는 거북, 학, 사슴, 불로초와 더불어 장생을 염원했던 우리 조상들이 아껴왔던 생명의 나무다. 적송(赤松) 또는 미인송(美人松)이라 불리우는 별칭 만큼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금강산 소나무는 정절과 절개의 미인처럼 아름답고 생명력이 강해 여름의 세찬 태풍과 겨울의 폭설에도 그 꿋꿋한 몸체와 하늘높이 뻗은 줄기를 지켜내고 있다.

금강산 소나무는 미인송 또는 적송이라 부른다
금강산 소나무는 미인송 또는 적송이라 부른다 ⓒ 양주승
금강산 적송(赤松)은 줄기의 상단을 제외하고는 잔 가지가 없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 폭설이 내려 가지에 눈이 쌓이면 그 무게를 못이겨 자연스레 부러진다고 한다. 폭설이 내려 자신의 가지는 처 내리더라도 둥지와 줄기 만큼은 몇 백년을 지켜오는 것을 보면 수많은 외세의 침략속에서도 한민족의 기상을 지킨 우리 민족성을 보는 것 같다.

조선의 궁궐들은 오직 소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최근 개보수 공사를 마친 경복궁 복원공사에도 소나무가 사용됐다. 소나무가 지조와 절개, 강인한 생명력과 같은 민족적 정서로의 상징성과 최상의 건축 재료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소나무는 건축재로서 부식을 막고 알칼리성에 견디는 능력이 강해 다리건축과 조선업에 좋은 재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소나무를 ‘민족의 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번 금강산 통일기행에서 알았다.

신계사 진입로 입구의 미인송
신계사 진입로 입구의 미인송 ⓒ 양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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