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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희의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 책 표지
ⓒ 미래M&B
그이는 눈물이 참 많은 사람이다. 걸으면서 여행을 하다가 아스팔트 위에서 여치를 밟아 죽였다고 도로에 주저앉아 우는 사람이다. 길 위에서 만난 이름 모를 이웃의 친절 앞에서도 눈물을 글썽이고, 딸자식 걱정하는 엄마 생각에 목이 메이고, 스스로에게 화가 날 때도 울고, 대견하다 싶을 때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이는 참 강한 사람이다. 땅끝마을부터 통일전망대까지 꼬박 한 달을 걷는 동안,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지금 죽을 지경인가?' 물어보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길 위에 서면 발바닥의 물집도, 내리쬐는 한여름의 햇볕도, 혼자라는 외로움이나 낯선 곳에서의 낯선 아침들이 주는 막막함도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국토종단을 시작하기 얼마 전엔가 그이가 <오마이뉴스>에 편지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오래 전인데도 그 편지가 이렇게 생생한 까닭은, 글 속에 묻어나던 절절함과 진솔함 때문이다. 긴 이별 편지를 보면서, '이 사람, 상처받았지만, 그래도 잘 이겨낼 수 있겠지?'하며 응원하던 마음까지 생생하다.

이 정도로 솔직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주먹 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이는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김남희.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새삼 이 사람이 참 좋아졌다. 남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일에도 울 줄 아는 사람이어서 좋고, 힘들다고, 죽을 것 같다고, 그렇지만 끝까지 살아낼 거라고 이 악물 줄 아는 사람이어서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 끝없는 애정으로 이 땅 곳곳을 혼자 걸어온, 대책 없이 용감한 사람이어서 좋다.

이 책 덕분에, 나도 내가 다녀온 곳들을 새삼스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뭐,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이가 감동받고 가고 또 가고 싶어하는 곳들 가운데 많은 곳이 내가 품고 있는 풍경들과 겹친다. 아우라지가 그렇고, 탁동철 선생님 계시는 양양이 그렇고, 곰배령이, 섬진강이, 그리고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이 그렇다.

정선에 있는 아우라지에 갔을 때 나 역시 옥산장(2부, '삶도 예술이고 이야기 수준도 예술이네'에 나온다)에 머물면서, 김남희씨가 그랬던 것처럼 돌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전에 처음 갔을 때랑 지금은 똑같은 곳이라고 믿어지지 않게, 작은 마을 여량도 엄청 변했지만, 그래도 이 곳의 여름을 나는 늘 그리워한다. 강과 강 사이에 놓인 커다란 동아줄을 잡고, 배를 조금씩 밀어 강을 건너 아우라지 처녀상에서 바라보던 물길을 좋아한다.

이번 여름에 그 곳에 다녀온 내 친구는 정선 아라리도 듣고 옥산장 아주머니한테 녹음 테이프도 선물받아 왔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못하신 것 같아 걱정이라는 소식과 함께.

올 봄에 다녀온 양양의 공수전분교 생각도 난다. 수줍음 많고 정 많은 탁동철 선생님(1부, '숙제 안 해온 벌이 라면 먹기?'에 나온다)이 계신 곳이다. 올해도 아이들은 선생님이랑 작은 텃밭에 온갖 것들을 기르고 있었고, 시를 쓰고, 마음껏 노래도 하고, 아침이면 날이면 날마다 축구를 한다고 했다.

김남희씨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아이들과 축구를 얼마 동안 해보기도 했었지. 제대로 못 한다고 아이들한테 구박만 받았지만. 양양에 살고 있는 우성숙 선생님네(1부 '두 선녀들이 목욕한대요'에 나온다) 남호 생각도 난다. 남호 녀석, 밴드 만들어서 여학생들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데, 몇 년 뒤에는 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하겠다고 꿈에 부풀어 있다지.

▲ 탁동철 선생님 계시는 공수전분교 아이들.
ⓒ 김은주

곰배령(2부, '한때는 꽃을 사모했으나 이제는 잎들이 더 가슴에 사무친다'에 나온다)은 또 어떻고. 작은 숲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간 정상에 그렇게 멋진 풀밭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아는 귀한 고갯길이다. 들꽃들의 낙원이라는 그 곳에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이 불 때마다 풀들이, 나무가 제가끔 그 바람에 몸을 싣고 기분좋게 흔들리고 있는 곳이었다.

▲ 곰배령 꼭대기에서.
ⓒ 김은주

섬진강(2부, '가다가 강가에서 요놈 한 잔씩 묵으면서 가'에 나온다)을 찾아갔던 날들도 오래도록 마음을 적시는 시간이었다. 섬진강 하얀 모래밭에 오래도록 앉아서 강물에 눈을 적시던 날들, 벚꽃 환한 쌍계사 십리길을 걸어걸어 올라가던 날들, 해 지는 섬진강에 한참 마음 빼앗기던 날들. 내 속에서 섬진강은 늘 파랗게 일렁이는 곳이다.

김남희씨가 무턱대고 김용택 선생님네 집을 찾아가 어머니 옆에서 하룻밤 자기까지 했던 대목에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지. 그러면서 막무가내 여행이 내심 부러웠다.

여행 가기 전에 숙소며 교통편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지 않으면 무지하게 불안해하는 나 같은 사람은, 길 위에 섰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이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닫힌 상태일 수밖에 없으니까. 어쨌든 곳곳에 등장하는 김남희씨의 좌충우돌 사건사고는, 여행기도 이렇게 발랄한 재미를 지닐 수 있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 섬진강에 해가 지고 있다.
ⓒ 김은주
시간이 더 가면, 내가 품은 풍경들도, 김남희씨가 책에 담은 풍경들도 변해 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싫다고 해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곳에 몸을 묻고 사는 사람들이 변해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그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너무 많은 것이 변해서 이 땅 전체가 낯선 얼굴로 다가가지 않게, 그 정도의 속도로만 변해 가기를 바랄 뿐.

책 한 권으로 발에 물집도 없이 국토 종단도 너끈히 끝냈고, 좋았던 여행의 추억에도 함뿍 잠길 수 있었다. 이제 기다릴 것은, 세계를 떠돌고 있는 그이가 얼른 세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멋진 여행기 한 권 더 내는 것밖에 없나?

지금도 길 위에 서 있는 그이가 평화롭게 여행을 마치고, 건강하게 삶에 복귀하기를, 그리고 바라는 대로 게스트하우스의 멋진 주인이 되기를 빈다. 그리고 그 집에 내가 꼭 놀러가게 되기를 더불어 꿈꾼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김남희 지음,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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