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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은 진작에 사라지고 편액만 이렇게 홀로 전해진다. 하지만 사라진 돈의문은 '엉뚱하게도'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돈의문은 진작에 사라지고 편액만 이렇게 홀로 전해진다. 하지만 사라진 돈의문은 '엉뚱하게도'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아닌게 아니라 앞서 문화재 지정명칭을 변경할 때에 관보에 고시된 내용을 살펴보면, 그 이름을 고친 까닭이 '원래명칭으로 환원'하는 것이라 했고, 실제의 표기방법에 있어서 괄호를 덧붙여 남대문이나 동대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대로 허용한 대목에서도 이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름을 고친 것은 원래의 정식명칭으로 바로잡기 위한 조치라는 정도의 의미로 보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대문의 경우는 어떨까?

서대문의 본디 이름이 돈의문(敦義門)이었고, 달리 신문(新門) 즉 '새문'으로 불렀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종로 방면에서 경희궁 쪽을 이어지는 도로의 이름이 '새문안길'인가 하면 그 양편으로 새문안교회도 있고 또 '신문로'라는 동네가 남아 있으니 그 흔적은 뚜렷한 편이다.

하지만 오늘날 돈의문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뿌리를 굳게 내린 쪽은 역시 '서대문'이다. 무엇보다도 행정구역 자체가 '서대문구'라 하였고, 서대문로터리에다 지하철 서대문역이 있으며, 오래 전 서대문형무소나 경부선 서대문정거장도 기억하기에 새삼스러운 이름들이다.

<태조실록>에는 동대문, 남대문, 동소문, 서소문과 같은 이름이 줄줄이 등장한다. 하지만 돈의문의 속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태조실록>에는 동대문, 남대문, 동소문, 서소문과 같은 이름이 줄줄이 등장한다. 하지만 돈의문의 속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런데 이만한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문헌이나 자료를 죽 훑어보면, 애당초 '서대문'이라는 호칭이 그리 달가운 이름은 전혀 아닌 듯하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조선왕조실록>에 몇 가지 단서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태조 5년 9월 24일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들어있다.

"또 각문의 월단과 누합을 작(作)하매, 정북은 숙청문이라 하고, 동북은 홍화문이라 하니 속칭은 동소문이고, 정동은 흥인문이라 하니 속칭은 동대문이고, 동남은 광희문이라 하니 속칭은 수구문이고, 정남은 숭례문이라 하니 속칭은 남대문이고, 소북은 소덕문이라 하니 속칭은 서소문이고, 정서는 돈의문이라 하고, 서북은 창의문이라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우리가 익히 아는 동대문이니 남대문이니 동소문이니 서소문이니 하는 이름은 속속 등장하지만, 유달리 돈의문의 속칭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어찌 된 영문인지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 서대문이라는 명칭은 두 어 군데에서 간신히 찾아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만큼 서대문이라는 이름은 사실상 처음부터 용도폐기된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물론 돈의문의 속칭으로 통용되던 이름은 서대문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신문 즉 새문이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새문'이란 것은 세종 임금 때에 원래 있던 서전문(西箭門)을 없애고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렇게 한번 붙여진 이름은 세월이 흐르도록 그 효력을 톡톡히 발휘했던 것이다. 문이 만들어진 지는 이미 수 백년이 지났으니 새문은 더 이상 새문이 아니었으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에 아랑곳없이 줄곧 '새문'으로 통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돈의문의 속칭을 '신문'이라고 적고 있을 뿐 서대문이라는 구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돈의문의 속칭을 '신문'이라고 적고 있을 뿐 서대문이라는 구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돈의문이 서대문이 아니라 새문으로 통했다는 사실은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수록된 기록에서도 잘 확인된다.

"경성(京城) 팔문은 정남은 숭례라 하며 속칭으로 남대문이라 부르고, 정북은 숙청이라 부르고, 정동은 흥인이라 하며 속칭으로 동대문이라 부르고, 정서는 돈의라 하며 속칭으로 신문(新門)이라 부르고, 동북은 혜화라 하며 속칭은 동소문이라 부르고, 서북은 창의라 하고, 동남은 광희라 하며 속칭으로 남소문이라 하고, 서남은 소덕이라 하며 속칭으로 서소문이라 부르고 또 수구문이 있어 이 양문으로 장사지낼 사람이 나간다."

여기에 보면 도성의 여덟 문이 대개 방위 개념과 관련된 속칭을 갖고 있으나, 돈의문의 경우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그저 '신문'이라 부르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시기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관념은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가령 <독립신문>의 기사를 몽땅 훑어보더라도 한결같이 '새문밖'이니 '새문안'이니 하는 표현만 수두룩하게 나올 뿐이지 서대문이라고 지칭한 구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의 경우에도 서대문정거장을 일컬어 '새문밖정거장'이라고 적어놓은 사례는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돈의문을 가리키는 '새문'이라는 개념은 '서대문'이라는 용어로 뒤바뀐 것일까?

마츠다 코(松田甲)의 <조선만록>(조선총독부, 1928)에는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츠다 코(松田甲)의 <조선만록>(조선총독부, 1928)에는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 이순우
알고 봤더니 여기에도 예외 없이 조선 땅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의 위세가 있었다. 정확히 그 단초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지만, 이른바 경성거류민들 사이에 통용되던 이름이 바로 '서대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네들에게는 돈의문도 아니고, 새문도 아니고, 그저 간단명료한 서대문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서대문이라는 용어가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자료로도 잘 확인된다.

우선 1926년에 경성부공립보통학교교원회에서 편찬한 <향토자료 경성오백년>에는, "신문 즉 내지인(內地人)이 서대문이라 부르는 것은 이전에… 운운"하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밖에 마츠다 코(松田甲)의 <조선만록>(조선총독부, 1928)에도 "돈의문을 조선인은 신문, 내지인은 서대문이라 부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이 이러하다보니 새로운 시설이나 지배기관이 들어서거나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족족 그네들의 편의대로 서대문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면서 이러한 용법은 더욱 확산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수십 년간에 걸친 식민통치기간이 있었으니 그 누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한번 굳어진 용법은 해방 이후에도 전혀 고쳐지질 않았다. 어쨌거나 '서대문'이라는 용어는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우리들에게도 잘 길들여진 이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한지라 지금에 와서 하루아침에 이를 바로 잡는다는 것도 분명 현실적으로 만만한 일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아무리 형편이 그렇더라도 지하철 '서대문역'의 명칭을 '새문역'으로 바꾸는 정도의 시도는 충분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가 뭐래도 서대문이라는 이름은 이 땅에서 일본인들의 위세가 판을 치던 시절에 만들어진 참으로 마뜩찮은 유산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여(余)는 경성 서대문(西大門)이올시다"
<매일신보> 1915년 3월 4일자에 수록된 돈의문 최후의 기록

▲ 도시구역개정이라는 명분으로 500년 묵은 '새문'은 1915년 3월에 끝내 헐려나갔다. 더구나 돈의문은 '새문'이라는 이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나는 세종조 즉위 삼년 즉 서력 기원 일천 사백 이십 일년에 축성도감의 지휘 하에 팔도 장정 삼십만 명의 손으로 탄생된 경성의 여덟 성문되는 우리 팔 형제 중에 둘째되는 돈의문(敦義門)이올시다.

세상 사람이 통칭 부르기를 서대문이라 하며 또 말하기를 새문이라 하는 고로 몇백 년 내려오면서 나는 많이 먹어도 항상 간난아이다려 새아기새아기 하는 셈으로 새문새문하더니 지금은 이 새문이 아주 경성의 여러분과 인연이 지나서 오는 육일에는 경매가 되여 간다 합니다.

새벽서리 찬바람에 삼십 삼천 파루소리가 종로 종각에서부터 떵떵 울려나오면 수문군사는 단단히 닫혔던 나의 입을 넓이 열어 그 당시 말로 팔만 장안 억만 가구의 늙은이 젊은이가 마음대로 나가기도 하고 팔도 삼백 육십 관의 사나이 여편네가 마음대로 들어오기도 하다가 저녁해는 인왕산을 넘어가고 밝은 달이 세상을 차지할 때 이십 팔수 인정소리와 같이 입을 다물여 성외 도적의 출입도 막고 불시 지변도 방비하던 내로소이다.

평시에 나의 직무는 삼백 육십 일 밤낮 이러하지만 일조 국가에 병화(兵禍)가 생길 때에 무재무능한 나도 능히 국가의 간성(干城) 노릇을 하여 성하에 몰아오는 군사의 탄환과 활살은 모두 나의 한 몸으로 향하여 모여들 것만은 이를 능히 견디고

이때까지 엄연하게 한성 서편을 지키고 있다가 다만 몇 푼에 경매가 되여나가 나의 영화롭고 훈공많고 귀중한 이 몸이 무무한 백성의 집 뒤간 기둥이 될는지 하루 밤 남의 잠 잘자이려고 아궁이 신세를 지고 한 주먹 재가 되어 사나운 봄바람에 정처없이 떠다닐 생각을 하니까 늙은 신세에 눈물이 저절로 옷깃을 적십니다.

당초에 우리 팔 형제가 생길 때에 당시 우의정 이원(李原)이라는 재상이 도읍의 성곽은 집안의 울타리라 하며 여덟 문을 세우고 도성을 중수하자 조정에 의론을 세우셨으므로 우리 팔 형제는 그 중대한 책무를 스스로 어렵게 맡아 임진란 병자란과 홍경래의 큰 난리에 만고풍상 다 겪은 말 어찌 이루 진달하리이까.

나의 문루를 지탱하여 주는 늘 복판에 가려 있는 날개 돋힌 이 백호는 아직도 위엄이 상치 않고 서관길 천여리에 향긋케 붙어 있는 '돈의문' 현판은 먹자국이 새롭건만 세월이 가고가고 시세가 변하고 변한 것이야 어찌할 수 있으리까.

우리 끝에 동생 서소문은 지난 섯달에 헐려갔고 우리 맏형 동대문과 셋째 아우 남대문은 좌우편 성이 뭉그러져 몇 해 이래로 우리 형제와 연신이 전혀 끊겼는데 지금에 이 몸조차 형해를 잃게되니 이전을 돌아보고 지금을 생각하매 감구지회를 어찌 금하오리까.

이전에는 도읍 서편에 중진(重鎭)이라 송장출입은 상의라 물론이오 내 몸에서 고리배 묵못 하나만 빼어가도 대명률(大明律)에 조율하여 엄한 형벌을 씌워서 이 몸을 보호하더니 이제는 나라에서 공번되이 이를 팔아 도끼와 연장이 무참히 나의 몸을 파회할 생각을 하니 소름이 죽죽 끼치나이니다.

십년 전에 미국사람 골불안(骨佛安)이가 와서 전차를 놀 때 내 문턱이 너무 얕다고 아래를 들이 파서 주추가 모두 드러나서 남 부끄러워 남부끄러워 하며 골불안이라 하는 양인은 나를 이 모양이 되게 하였으니 저의 뼈도 편안치 못하리라 하고 원망을 하였더니 지금에 아주 없어질 줄이야 어찌 꿈에 인들 측량하였사오리까.

이 생각 저 생각 슬픈 일만 생각하면 한없고 끝 없지만은 한번 돌이켜 다시 도량넓게 생각하여보면 내 몸이 헐려가는 것이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이전에 사람의 지혜가 열리지 못하였을 때야말로 이런 성문이 능히 도읍에 간성이 되었지마는 세상 매사가 모두 진보발달되여 지난 번 우리 문아래로 지나가는 양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즉 덕국의 대포 한방이면 남산이라도 무너진다 하니

나 같은 놈은 골백이 있어야 조금도 쓸데가 없고 도리여 전과 달라 번화한 경성의 교통에만 방해가 될 뿐이오 더구나 도로개정으로 인하여 헐리인다 하고 내 몸둥이되였던 석재는 다시 여러분이 밟고 다니실 길로 들어간다 하니 죽어도 아주 죽는 것이오 공번된 큰일을 위하여 몸을 버리는 것이니 '서대문'의 면목으로 어찌 기껍지 아니하오리까.

그도 또한 나 혼자 당하는 일이 아니오 경향 각처에 대동지환이오 동대문이나 남대문 같이 잘 생기지도 못하여 옆으로 길을 돌리고 보전하여 주기를 바랄 수도 없는 고로 일희일비로 사백 구십 오년을 한 세상으로 알고 돌아가며 경향 제위에게 작별을 고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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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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