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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시대인 1323년 어느 날 중국 황해 연안의 항구 영파(당시 경원)에서는 한 무역선이 닻을 올려 항해 길에 오른다. 일본 구주의 하카다를 향해 출항한 무역선에는 수많은 도자기와 금속제 등 공예품 수만점이 실려 있었다.

당시에는 동력 대신 바람을 이용한 항해여서 몇 날 며칠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배는 황해를 건너 고려 땅인 서해안을 통과해 일본 열도로 향하는 항로를 잡고 있었다. 중국 영파항을 출항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배는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항해 중이었다. 지금의 전남 신안군 증도면 인근 해역에 다다랐을 때 배는 엄청난 풍랑을 만나 결국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신안 앞바다서 인양

▲ 신안선의 축소모형.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그로부터 700여년이 흐른 지난 1975년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 수백년 동안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채 바다 밑에서 잠자던 난파선은 한 어부의 그물에 걸린 6점의 도자기로 인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인양작업이 시작돼, 9년 동안 건져 올린 유물은 도자기 등 공예품을 비롯해 목재와 식물, 씨앗 등 2만300여점에 이른다. 화물을 실은 무역선의 형체도 바다 위로 나왔다. 지난 1980년부터 4년 동안 선체 파편 720여점도 인양됐다. 실려 있던 각종 화물과 이를 입증하는 물표가 난파선의 목적지와 당시 교역형태를 짐작하는 역사적 단서를 제공했다.

유물 가운데 목패에는 화물주의 이름과 선적날짜, 일본 후쿠오카의 하코자키궁과 조적암, 경도의 동복사라는 절이 목적지라고 새겨져 있었다. 따라서 일본 사찰로 가는 화물을 실고 중국 절강성 영파를 출항한 이 배는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길이 34m, 폭 11m, 200톤 규모인 난파선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것인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개관하기 직전인 지난 94년 문화재연구소 부설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연구소가 주관해 700여 동안 바다 밑에 잠들어 있는 고대 무역선에 대한 복원작업에 착수, 지난 2003년 인양된 선체 파편으로 실물복원을 완료했다. 유속이 빠른 바다 밑에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다행히 남아 있는 부분은 갯벌에 묻힌 난파선의 우측 부분이었다.

바다 속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 좌측 부분과 수많은 화물들은 강한 조류와 각종 바다생물들에 의해 본래 모습을 잃었다. 난파선은 도자기 등 실려 있었던 화물에 대한 인양작업을 마친 뒤 분리해 인양했다고 한다.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 이철한씨는 "해체 인양된 선체 편을 축소해 모형으로 제작해 복원한 결과, 신안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복원작업은 목재로 된 선체파편의 나이테와 못 구멍 등을 상하로 맞추는 등 조립과 해체작업을 반복했다.

이 난파선에서 원나라 시대 동전이 28톤이나 실린 사실이 흥미를 더 해준다. 동전은 중국 광동성 일대를 비롯해 아열대 지방에서 자생하는 자단목도 함께 실렸는데, 배의 맨 밑에 실어서 균형을 잡아주는 추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화물주 이름과 선적연도, 목적지 등이 적힌 목패로 선체파편과 함께 인양됐다.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 이철한씨는 "화물주가 일본 사찰인 만큼 동전을 녹여서 불상을 만들기 위해 구입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신안 앞바다에 인양된 이 배는 신안선으로 이름 지어졌다. 고대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무역선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신안선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 높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조선기술과 경제와 나라간 교역규모 그리고 항해술과 공예기법 등을 포함한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올 연말까지 이미 유실된 신안선의 선형을 철제 프레임으로 가상복원해 관람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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