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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
화석정 ⓒ 곽교신
답사차 너댓번 들른 곳이지만 화석정에 올라 정자 왼편으로 보이는 임진나루터 자리를 내려다보면 그때마다 팔과 얼굴에 소름이 돋고 젖은 눈을 훔치게 된다. 쉽사리 정자에서 내려오질 못한다. 400년 전 음력 4월 그믐 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뜷고 이 정자를 활활 태우던 불길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고, 그 불길의 한심한 용도를 생각하며 임금 선조를 향해 분노하고, 이 정자의 비참한 용도를 예견하며 홀로 눈물 흘렸을 율곡 이이를 생각하며 억장이 무너진다.

이 이야기는 잊고 싶지만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지만 들려주어야 한다. 부끄러운 검은 역사라고 땅에 파묻거나 흙벽에 넣고 회를 발라 감춘다한들 있던 사실이 사라지거나 검은 역사가 희어지진 않는다. 제대로 곱씹지 않는 역사는 반드시 다시 돌아와 비수를 들이댄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제대로 되삭이지 못한 조선은 300년이 조금 지난 1910년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비수에 정수리가 찔려 숨이 끊어졌다.

전하, 땅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10년 전인 1582년 9월 초, 율곡은 경연에서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로 간곡히 고한다.

"10년이 못가서 땅이 무너지는(土崩) 화가 있을 것입니다.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 도성에 2만, 8도에 1만씩 배치하여 6개월씩 교대로 도성을 수비하다가, 외침이 있을 때 10만 병사로 방어책을 삼아야합니다. 이리하지 않다가 국난이 일어나면 훈련되지 않은 백성을 갑자기 모아 전투해야 하니 결국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율곡 이이의 '10만양병론'이다. 그러나 율곡의 선각자적 호소는 유성룡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의 반대와 선조의 외면으로 철저히 무시된다. 그 후로도 율곡은 양병과 군비증강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다가 10만양병 상소 1년 뒤인 이듬해 6월, '교만스레 임금을 업신여겼음'을 이유로 삼사에서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를 퇴임한다. 퇴임 직전까지 계속된 율곡의 한결같은 주장은 이렇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대로 3년을 시행하고서도 민생이 불안하고 나라에 소용이 없으며 양병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신을 도끼로 참수하시더라도 달게 받겠나이다."

실록을 세밀히 보면 탄핵 직전에 선조는 율곡의 주장에 조금 귀를 열었었다. 아주 조금. 그러나 곧 귀를 닫았다. 그렇게 귀를 닫은 지 9년이 지난 비오는 새벽에 조선은 백성들 몰래 경복궁 문을 닫아야 했고 닫은 문은 백성들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그 후 7년간 조선 8도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참상에 빠진다. 율곡의 경고대로 '10년이 못가서 땅이 무너진'것이다.

율곡 이이는 퇴임 후 향리 파주목 율곡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거기서 그는 5대 조부가 지은 후 대대로 물려온 화석정을 본래 목적이 아닌 매우 요긴한 용도에 쓸 것을 착안한다. 그는 정자를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재목으로 옹이가 촘촘히 박힌 소나무를 들여온다. 관솔이 많이 박힌 소나무는 일이 더딜 뿐더러 대패와 톱을 버리게 만들므로 목수들이 불평하였으나 무시하였다. 보수 후에는 들기름이 듬뿍 먹은 걸레로 자주 닦도록 해서 마루며 기둥이 들기름에 절을 지경이 된다. 사람들은 율곡이 선대로부터 내려온 정자를 극진히 아끼는 걸로 알았다.

퇴임 이듬해 율곡이 향리에서 세상을 떴을 때, 그의 집에는 문상객을 대접할 음식조차 부족했다.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이판, 형판, 병판을 지낸 고급관리가 죽었는데 그 집에 문상객 맞을 곡식이 없는 신하를 쫓아낸 것은 당시 조정이었다. 율곡이 세상을 버리던 날, 공의 부인은 지붕에서 흑룡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청룡 백룡이 어우는 꿈을 꾸고 서울에서 부인이 머물던 강릉 처가까지 가서 합방을 하여 공을 잉태하였고, 사임당의 태몽에도 아이를 안은 용이 치마폭으로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에 공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의 방을 '몽룡실'이라 이름한 것이니 비록 꿈이지만 우연도 이쯤이면 기이하다고 하겠다.

도성이 왜군의 목전에 놓이고

많은 역사서에는 "1592년 4월 29일, 신립장군 휘하 8000 군사 전멸, 신립장군 남한강 투신 자살의 화급한 장계가 올라왔다"고 정식 장계가 올라온 것으로 써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정에서 굳게 믿었던 신립 장군 패전의 첫 전갈은 한심한 패전만큼이나 패전소식이 전해진 과정도 한심했다. 신립 진영에서 도망쳐 식솔을 챙기러 말을 타고 부랴부랴 충주에서 달려온 세 명의 군졸에 의해 도성 내 저자거리에 퍼진 소문이 대궐로 들어간 것이 패전의 제일보였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지 불과 보름만의 일이다.

충분히 예상되었던 왜의 침공이었으나 조정은 외교정책의 판단 착오에서가 아니라 당쟁의 진흙탕에 뒹구느라 군사채비가 전무했다. 적이 오기도 전에 미리 도망가는 수비군이었으니 왜군은 전투를 하면서가 아니라 거의 행군대열로 상주까지 왔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한 동래성 전투를 제외하곤 왜군은 싸움다운 싸움도 없이 상주까지 점령했다.

"지나는 곳에 풀포기도 남기지 말라!"며 초토화 작전으로 동래성, 밀양성, 상주성을 차례로 점령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카'는 상주에서 진영을 정비하며 문경새재에서의 일전에 대비한다.

새재 전투를 한양성 점령의 최대 고비로 생각한 고니시는 새재에 세 번이나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 동태를 거듭 정탐한다. 수비군의 입장에서는 새재야말로 난공불락 천혜의 방어요새이다. 그런 새재에서 모조리 철수한 조선군의 이상한 전술에 의아해 하며 고니시는 유유히 새재를 넘는다. 왜군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났다. (歌舞而過云)"고 하며, 고니시는 "천혜의 지형을 쓸 줄 모르니 조선에는 장수가 없다"고 단언했다 한다. 고니시에게 한양길을 그냥 열어준 신립의 '문경새재 포기 - 충주벌 배수진 전투'는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미스터리 중의 하나이다.

어쨌거나, 왜군이 새재를 넘었으면 한양은 지천이다. 당쟁에는 매우 유능했던 조정 중신들이 매우 무능하게 내놓은 대책은 선조의 몽진뿐. 이때 유성룡은 10만양병을 주장했던 십년 전의 율곡을 떠올리며 유명한 회한의 말을 남긴다.

"평화시에 많은 군사를 일으키면 (백성들이) 소요할 것을 염려하여 그것(십만양병)이 불가하다고 (반대)했는데, 지금에 보니 이문성(율곡)은 참으로 성인(眞聖人)이다. 그의 말대로 하였다면 오늘날 나라가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아직 임금이 궁안에 있었건만 이미 지엄한 궁중 법도가 땅바닥에 떨어진 4월 29일 밤 경복궁의 혼란상을 실록은 이렇게 적는다.

"... 호위군사는 모두 달아나고 궁문에는 자물쇠도 채워지지 않았으며 물시계는 멈추어 시간을 알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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