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자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임진나루터 자리. 사진 윗쪽의 강건너가 임진각 부근.
정자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임진나루터 자리. 사진 윗쪽의 강건너가 임진각 부근. ⓒ 곽교신
장대같은 빗줄기가 퍼붓는 4월 그믐날 밤의 임진 나루터.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파주관아에서 채비해 두었던 나룻배는 폭우로 불어난 물살에 자취가 묘연하고 쪽배라도 찾으려니 거센 빗줄기에 등촉하나 켤 수 없어 사방은 어둠 속이었다. 비에 젖고 진흙에 빠진 몽진 행렬은 금상의 위엄은 커녕 초라하기가 저자거리의 거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급기야 선조가 영상 앞에서 통곡을 시작하니 주위의 신하들이 바로 쳐다보지를 못했다. 몽진을 호위하며 타고난 재담으로 환란 중에도 일행에 웃음으로 여유를 주던 백사 이항복도 당황하다가 불현듯 8년 전 타계한 율곡의 말을 생각해낸다. 흰 봉투를 남기며 반드시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열어보라던 율곡의 유언을 생각하고 급히 봉투를 대령하여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 한 마디만 써있었다.

관솔 촘촘한 소나무로 보수한데다 들기름에 절고 절은 화석정은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맹렬한 기세로 타올라 강건너까지 환히 비추었으니 그 불빛에 의지한 선조 일행은 거센 물살에 배가 잠길듯 아슬아슬하게 강을 건넜다. 아니 강을 건너 도망갔다. 그날 밤, 칠흑같은 어둠의 임진나루를 밝히며 맹렬히 불타오른 건 화석정이 아니라 율곡이었을 것이다. 그 화염은 송진덩어리로 화석정에 서있었던 율곡이 선조에게 보낸 성은의 보답이요, 동시에 분노였을 것이다.

나는 답사팀을 이끌고 가서 이 장면을 상상으로 그리며 설명할 때 파천이나 몽진이란 말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냥 "강을 건너 무사히 도망갔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대목을 말할 때마다 내 목소리는 떨리고 내 눈은 젖어 있다.

종묘사직의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금상(今上) 선조는 백성을 왜적의 아수라에 남겨놓고 혼자 도망갔다! 땅과 백성이 뭉텅이로 사라지는데 종묘 위패만 움켜쥐고 있으면 나라는 서는 것인가 ? 남에서 왜가 쳐들어와 북으로 몽진할 임금이 임진나루를 건널 것을 예견하고, 8년 전 정자에 눈물섞인 들기름을 먹였을 율곡을, '8년 전에 죽은 신하가 멀쩡히 살아있는 임금을 피난시킨' 이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내 땅의 역사를 어찌 성한 눈으로 이야기한단 말인가 ?

답사객들에겐 잔인하지만, 그날 밤으로부터 약 360년 후에 있었던 한강 인도교 폭파도 얘기한다. 공산군의 남진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기 위해 피란민 행렬이 가득했던 인도교를 폭파시켰듯이, 선조 자신은 '도망'가는 주제에 도성의 사대문은 굳게 잠그고 가며 성안의 백성들이 왜적을 맞아 끝까지 싸울 것을 원했다. 겁에 질린 백성들은 재주껏 담을 넘어 '도망'을 가야 했다. 어찌 이리도 똑같은가 ?

군신유의(君臣有義) 네 글자를 들먹이며 신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우기면 끝나는 일인가? 무수한 남정네가 살륙당하고, 무수한 부녀자가 왜놈에 겁탈당하고, 무수한 초가삼간이 왜놈의 불길에 사라졌어도 임금은 백성의 세금으로 점심 저녁 챙겨먹고 강을 건너 도망간 이 일이 두고두고 당당할 수 있는가? 이것이 군신유의인가?

또 묻는다. 이 시대의 우리는 이 억장이 무너지는 일을 정말 자신있게 비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율곡을 이 시간 이 땅 어디에선가 또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

박정희가 쓴 글씨.
박정희가 쓴 글씨. ⓒ 곽교신
위의 이야기는 철저히 야사(野史)를 주인으로 대접해야 제대로 성립한다. '야사'라는 말에는 미확인, 비사실,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 등의 진실성을 의심하며 비하하는 뜻이 숨어 있다. 그러나 백성은 적과 싸우라고 성에 가두고 혼자 야반도주한 임금을 '군신유의'를 내세워 대접하고 쓴 기록을 나는 정사(正史)라 말하고 싶지 않다.

대체 무엇이 정사이고 무엇이 야사인가 ?

국정 국사교과서에 밑줄 그어가며 정사로 알고 배운 율곡의 10만양병론도 야사로 만들기를 꾸준히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10만양병론을 야사라 주장하는 나름의 논리도 정연하다. 선조의 몽진을 호위했고 임진란을 조정에서 진두 지휘한 당대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은 퇴임 후 왜란의 전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대문장 '징비록'을 저술했다.

이 징비록엔 선조의 임진강 도강을 밝힌 불은 화석정의 불길이 아니라 강변의 승청(나루터 관리용 관가건물)과 재목을 태운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얘기를 듣고 자란 파주 사람들은 징비록의 기록을 믿지않는다.

나는 대학자 서애의 양심과 파주 민초들의 양심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등하다가 백성들의 편에 서기로 했다. 임진란의 참상을 낱낱이 기록했다는 징비록이지만 서애는 직접 보았을 중요한 사실들의 기록을 회피한 것을 느끼고 부터다. 민심은 천심이다. 백성들에게 전해내려오는 말은 무조건 야사이고 대유학자의 기록은 무조건 정사인가 ?

초등학교 때부터 율곡을 배웠어도 우리는 청소년기 율곡의 그늘을 알지 못한다. 계모와 형의 극단적인 갈등을 못견뎌 어머니 사임당신씨의 3년상을 마치자마자 편지 한 장 써놓고 집을 떠난 율곡은 알지 못한다. 겉으론 '출가'의 명분을 띄고 있지만 편지 내용으론 분명히 '가출'이었다.

이것은 야사라서 사실이 아닌가? 온화한 사임당과 바르게 자란 율곡에게 먹칠을 하기에 정사로 넣지 못하는가? 우리의 정사는 때론 그렇게 절뚝거린다.

설화나 전설도 최소한의 근거가 없이는 지어지지 않는다. 어엿한 역사의 일부인 많은 야사가 심봉사 앞에 내민 뺑덕어미의 개다리 밥상처럼 거짓투성이의 찬그릇은 아니다. 야사는 정사의 서자가 아니다. 정사는 무조건 정답이고 야사는 늘 오답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는데 지구가 도는 것이 정답이 아니었던 때를 기억해보라. 정사와 야사의 구분은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는 한 영원한 숙제이다. 역사(정사)는 사실의 기록이기에 앞서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화석정을 정비하고 '화석정' 현판을 친필로 걸은 박정희의 에피소드도 이미 야사 대열에 들어 있다.

광주사태도 그 시절 승리자의 기록에선 유언비어요 야사였다. 사실이 아니라 유언비어인 야사였고 광주시민들은 '폭도'였다. 그러나 똑같은 사실이 '광주민주화항쟁'이 되면서 정사가 되었고 정부는 야사 시절의 폭도들에게 보상금을 주었다. 우리는 폭도들에게 때론 보상금도 주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야사, 유언비어가 아니고 정사인 것이 못마땅한 사람이 아직도 도처에 널려 있다. 도대체 무엇이 정사이고 무엇이 야사인가?

서울역에서 기차도 다니고, 광화문에서 문산까지 좌석버스도 다니고, 직접 운전하고 가면 서울 기준으로 한 시간 거리의 화석정이다. 화석정에 가자. 화석정에 가서 떳떳한 야사로 뻔뻔한 정사들을 누르자. 역사책 속에서 사실들이 어떻게 휘어졌던 우리 머리 속의 역사는 곧게 세워두자.

그래도 희망이 있다

화석정을 떠날 때 답사팀의 얼굴은 갈 때와는 딴판이다. 일상을 떠나는 기대감에 다소 상기되던 떠날 때의 얼굴들이 아니다. 대개 말들이 없다. 몇 명이 모인 팀이건 조용하다.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그 분위기에선 나는 말을 극히 삼간다. 나는 그 조용함을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역사의 엑스터시'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엑스터시에 제대로 빠질 줄 아는 우리 백성들은 대대로 집권자보다는 훨씬 희망이 있는 백성들이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을 자주자주 의아하게 생각하며 살지만, 대한민국의 가장 큰 희망은 백성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든 헌법 1조 3항을 자주 외운다.

"대한민국의 희망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희망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관련
기사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 경기도 파주 화석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