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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이 깊어 있었다. 공원에는 늘 그렇듯이 어린이들이 놀이기구를 오르내리거나 그네와 시소를 타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장대를 이용해 가로수의 은행을 따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로변 곳곳에 보였다.

일요일, 복개천 가에 있는 공원까지 산책을 다녀오던 나는 동네에서 가장 열심히 재활용품을 모아다 파는 할머니를 보았다. 여느 때라면 집 앞에서 아무 표정 없이 종이 박스를 개키고 있거나 신문을 차근차근 눌러 쌓고 있을 할머니인데, 웬일인지 노여워하는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그 할머니가 폐지를 가득 싫은 작은 손수레를 끌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것을 발견하면, 아무리 출근길이 바빠도 일을 도와주곤 했었다.

"혹시 누가 여기서 주전자 같은 거 훔쳐 가는 거 못 봤소?"

할머니는 인사를 받고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아뇨. 못 봤는데요. 주전자를 잃어버리셨어요?"
"으딴 놈이 주전자랑 뭐이랑 비싼 것만 죄다 가져가 뿌렀네."
"고물상에 팔려고 모아 놓으신 건가요?"
"그랗소. 여그다 이렇게 넣어 두었는데, 담 너머로 팔을 넣어 집어간 건지 대문 안으로 들어가 집어간 건지 하튼간에…."

할머니는 담 안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할머니네 집은 담이 매우 낮았다.

"아, 내가 아파갖고 병원에 갖다옹게 집어갔으라."
"어디가 아프셔요?"

할머니는 턱짓으로 발을 가리켰다. 깡마른 한쪽 발 바깥쪽에 티눈이 박혀 있었으며, 다른 한쪽 발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짝 발에 티눈이 생겨서 뽑았는디, 이번엔 이짝 발에도 생겼으라. 그라서 또 수술을 하였소."
"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요."
"낼 실을 뽑는다는디… 실 뽑을 때 아프요?"

할머니 연세라면 수술 받은 적이 적지 않을 텐데 할머니는 처음 수술 받아 본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조금 따끔따끔하지요."
"아유, 아프겠구먼."
"할머니 당뇨 있으세요?"
"없으라."
"아마 연세 많이 잡숴서 잘 낫지 않는 모양이에요. 할머니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내년이 야든이오 야든."

그 연세의 할머니라면 온통 고생 다 하며 살아오셨을 게 뻔했다. 게다가 노령에 이른 지금도 한 달에 돈 일이십 만 원 버느라 매일 손수레를 끌고 다니시면서도 마음은 어린이 같았다. 그만큼 순수한 까닭이라고 생각했다.

"그거 다 팔믄 5천원은 족히 될 거구먼. 그전에는 구루마도 으딴놈이 훔쳐갔었는디."

대문간에 걸터앉은 할머니는 몹시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저 위에 사는 영감과 할미가 손수레 끌고 이리로 다니든데, 그 인간들이 안 가져갔으까 몰러."

집에 창고를 만들어 놓고 열심히 폐지 줍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60대 노인 부부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함부로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훔쳐갔다면 그것을 고물상에 가져다 팔 사람의 소행일텐데, 고물상에 재활용 폐품 모아다 파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꼭 그런지 알 수는 없으니까 그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당신들이 가져갔다고 하지는 마세요, 할머니. 괜한 싸움 날지 모르니까요."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그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단정짓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그만큼 도둑이 많아졌다. 이웃사촌이 아니라, 이웃이 도둑인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할머니, 제가 새 프라이팬 하나 가져다 드릴게요."

나는 얼마 전에 노트북 PC를 사면서 선물로 받았던 프라이팬을 떠올렸다. 돈 주고 사려면 5000원은 더 될 프라이팬이었다.

"내가 발이 이래서 그 언덕엔 못 올라가는디…."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가지고 올게요."

얼마 뒤에 내가 프라이팬을 가져다 드리자, 할머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꾸 사양을 했다. 그러나 나는, "저한테는 새 것이 또 있어서 필요없으니 드리는 거예요"하고는 언덕길을 다시 올라왔다.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구름도 너무 흰색이라 더없이 깨끗하게 느껴졌다. 푸르고 맑은 하늘엔 저렇게 깨끗한 구름이 떠가는 법인가. 아니라면 저렇게 깨끗한 구름이 흘러다니는 하늘이라 저만큼 하늘이 푸르고 맑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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