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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가을을 좋아했던 시인 천상병! 더불어 그의 시집인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 떠오른다. 이 시집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순수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표지
ⓒ 미래사
이 시집이 나온 것은 2001년 11월, 벌써 3년이 흘렀지만 어찌 보면 갓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수백 년 전에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순수함이 어린아이 같지만 한편으론 구석기시대 원시인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시인이 자주 머물렀던 작은 카페 <歸天>에서도 그대로 풍겨 나온다. 시인이 사진으로 살아나 귀천의 풍경을 창조해 주고 있으니 틀림없이 그렇다.

<마음 마을>

내 마음의 마을을
九千洞이라 부른다.
내가 千氏요 九千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중략)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재판소밖에는 없다.

(이하 생략)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천상병 시인은 나라에 죄도 짓지 않고 간첩죄를 지은 사람으로 몰려 중앙정보부에 호되게 당한 시인이다.

양력 1930년 1월 29일에 일본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천상병 시인은 1949년 마산중학 5년 재학 중에 당시 담임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초회 추천되었으며, 1951년 전시(戰時)에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에 입학하여 송영택,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했다.

<문예>지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전재함으로써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하였으며, 1952년에는 시 ‘갈매기’가 <문예>지에 게재되어 추천이 완료되었다. 1956년에는 <현대문학>지에 월평을 집필하고, 이후로 많은 외국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년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1971년에 거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즈음 유고시집 <새>가 발간됨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일화를 남겼다. 다행히 살아난 천상병 시인은 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 목순옥과 결혼하였다.

그의 시는 인생 그대로의 모습이 꾸밈없이 간결하게 압축되어 담겨 있다. 시를 어렵게 꾸미거나 비틀어 쓰려고 하지 않는다. 어려운 어휘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순결한 시인의 모습이나 마찬가지다.

시인 장석주의 <한국 문단 비사>는 천상병 시인의 뜻하지 않은 불행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1967년 7월 14일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 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 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 사건으로 확대, 조작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 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 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 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 한 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500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동독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 값으로 500원, 1000원씩 받아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 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한국 문단 비사>에 나온 대로 천상병 시인은 뜻하지 않은 세상살이의 절망을 맛보았다. 그러고 몇 해 뒤에 맞이한 추석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不惑의 추석>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老者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이하 생략)


1년에 한 번뿐인 추석날 차례 때도 고인 제대로 모시기가 어려울 만큼 가난한 데다 몸마저 형편없으니,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제삿날이라고 해서 별 수가 있을 턱이 없다.

<아버지 제사(祭祀)>

아버지 제삿날은 음력 구월 초사흗날
올해도 부산에 못 가니
또! 또!
아버님 영혼께서 화내시겠습니다.

가난이 천생(天生)인 것을
아버지 영혼이시여 살펴주소서
아버님도 생전에
"가난하게 살아야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젊을 때
천석(千石)꾼이었는데
일본놈에게 속아 다 날리고
도일(渡日)하여 돈을 버신 아버님.

아버지! 아버지!
지금까지 생존하셨다면
팔십이 살짝 넘으셨을 아버지
오로지 천국에서 천복(天福)을 누리옵소서.


선친에 대한 불효를 이렇게 솔직하게 노래한 시인은 막걸리를 좋아했다. 그래서 건강을 생각하여 덜 마시게 말리는 아내에게 투정하듯 노래했다.

<막걸리>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중략)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시인은 쓰러져 가는 자신을 살려준 아내를 아주 사랑한다. 그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 재미있게 시로 노래했다.

<내가 좋아하는 女子>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으뜸은
물론이지만
아내 이외일 수는 없습니다.

오십둘이나 된 아내와
육십 살 먹은 남편이니
거의 無能力者이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이 시 쓰는 시간은
89년 오월 사일
오후 다섯시 무렵이지만요-.

이, 삼일 전날 밤에는
뭉쿨 뭉쿨
어떻게 요동을 치는지

옆방의 아내를
고함지르며 불렀으나
한참 불러도

아내는 쿨쿨 잠자는 모양으로
장모님이
"시끄럽다-, 잠좀 자자"라는
말씀 때문에
금시 또 미꾸라지가 되는 걸
草者는 어쩌지 못했어요-.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 꾸밈없이 쓰는 시로 표현할 만큼 시인은 개구쟁이다. 그러나 순진한 개구쟁이다. '장모님 말씀' 때문에 꼼짝없이 기가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시인은 가을을 좋아했다. 가을을 좋아하는 시인은 들에 핀 들국화를 좋아했다. 들국화가 외로워서 좋아했다. 외로운 시인과 비슷해서 좋아했다.

그런데 그 들국화는 오직 들국화뿐이 아닌지도 모른다. 시인의 아내일 수도 있고, 세상사는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고, 세상에 없는 그리운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마음으로 들어가 보지 않는 한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오묘하고 신비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 권력기관에서는 좋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없는 간첩죄를 씌워 멀쩡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시인에게 자식이 없는 이유도 바로 그 후유증 때문이라지 않은가.

<들국화>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시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에는 ‘들국화’가 한 편 더 들어 있다.

<들국화>

84년 10월에 들어서
아내가 들국화를 꽃꽂이했다
참으로 방이 환해졌다
하얀 들국화도 있고
보라색 들국화도 있고
분홍색 들국화도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 방은 향기도 은은하고
화려한 기색이 돈다
왜 이렇게도 좋은가
자연의 오묘함이 찾아들었으니
나는 一心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시인은 들국화뿐만 아니라 국화도 좋아했다. 부잣집 안마당에 가득한 정원수일지라도, 국화꽃 한 송이에 견주면 부러울 것 없는 것이다. 시인은 국화꽃에 마음을 심고 그 국화꽃의 향기가 되어, 복잡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려고 했을 것이다.

<국화꽃>

(전략)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만이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시를 몇 번 읽고 가만히 떠오르는 영상을 바라보면 들국화나 국화는 어쩌면 윤동주 시인 같은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은 윤동주 시인와의 어느 날 만남을 이렇게 노래했다.

<은하수에서 온 사나이>
- 尹東柱 論

1
깊은 밤
멍청히 누워 있으면
어디선가 소리가 난다.
방안은 캄캄해도
지붕 위에는
별빛이 소복이 쌓인다.
그 무게로 살짝 깨어난 것일까?
그 지붕 위 별빛 동네를 걷고 싶어도
나는 일어나기가 귀찮아진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소리가 난다.
무슨 소리일까?
지붕 위
별빛 동네 선술집에서
누가 한잔 하는 모양이다.
궁금해 귀를 쭈빗하면
주정뱅이 천사의 소리 같기도 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리 같기도 하고
요절한 친구들의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닐 게다
저놈은
내 방을 기웃하는 도적놈이다.
그런데 내 방에는 훔쳐질 만한 물건이 없다.
생각을 달리해야지.
지붕 위에는 별이 한창이다.
은하수에서 온 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겁이 안 난다.
놈도
이 먼 데까지 와서
하릴없이 나를 살피지는 않을 것이다.
들어오라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뚜렷한 우리말로
한마디 남기고
놈은 떠났다.
"아침 해장은 내 동네에서 하시오"
건방진 자식이었는가 보다.

2
비칠듯 말듯
아스름히 닿아오는
저 별은
은하수 가운데서도
제일 멀다.
이억광년도 넘을 것이다.
그 아득한 길을
걸어가는지
버스를 타는지
택시를 잡는지는 몰라도
무사히 가시오.


천상병 시인이 아니고서 누가 일정(日政)과 군정(軍政) 양 시대의 절망과 파탄을 이렇듯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겠는가.

시를 아는 분이라면 다 알다시피 일본 땅에서 마루타로 죽어갔다고 하는 모국어 시인 윤동주, 민족의 큰 별인지라 시인은 그를 가리켜, 아름답지만 아주 먼 곳 '은하수에서 온 사나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은하수 가운데서도 가장 먼 곳에서 온 사나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만큼 존귀한 시인이란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니었을까.

천상병 시인 또한 큰 시인이니,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듯 <歸天>을 노래하고 하늘로 돌아간 뒤에는, 시인 또한 은하수의 별 하나가 되어 윤동주 시인을 만났을까? 은하수 동네에서 만나서 아침 해장이라도 함께 하였을까?

<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8

천상병 지음, 미래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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