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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출판 해바라기
내 손은 보통 남자들 손보다 작으며 웬만한 여자들 손보다도 작다. 나랑 동갑내기인 여자 고종사촌은 자신의 큰 손과 내 작은 손을 비교하면서, 남자 손이 어쩜 그렇게 작으냐며 부러움 반 놀림 반씩을 섞어 자주 말했다. 철들 무렵, 주위에서 이런 말들을 들을 때면 나는 여자 손보다도 작은 내 손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좀더 자라서 대학을 다니던 무렵에는 작은 손에 대한 부끄러움은 줄어든 대신 새로운 열등감이 추가되었다. 마디가 굵고 주름이 가득한 거친 손들 앞에서 굳은살 하나 없이 곱기만 한 내 손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내 손을 부끄럽게 만든 손들은 막노동을 해서 학비를 버는 친구의 손이기도 했고, 가끔씩 교정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던 <창작과비평> 영인본을 팔러 다니는 아저씨의 손이기도 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장을 담그거나 송편을 빚을 때 내 눈길이 한동안 머물던 어머니의 손이 그러했다.

그런 거친 손들에는 몸으로 살아낸 진정한 삶이 배어 있는 반면, 곱기만 한 내 손은 책이나 몇 권 들추고 글이나 몇 줄 쓴 것이 고작일 뿐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곱고 매끈한 내 작은 손이 많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잊고 지냈던 이런 부끄러움이 며칠 전 <손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책을 다시 읽으면서 되살아났다. 그 책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과학기술문명은 '손 노동자'들이 이룬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입 노동자'들은 손 노동자들의 수고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닐까? 제법 나이가 든 지금도 굳은 살 하나 없고 거친 구석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한 내 손은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직도 삽질이 서툴고 망치질이 어설프기만 한 나는 손 노동자가 아니라 입 노동자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을 부인하기 힘들었다.

2.

<손이 지배하는 세상>은 이렇게 나처럼 손으로 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입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자주 무시되고 업신여겨지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게 여겨지고 있는 손의 복권을 위하여 쓴 책이다. '정신의 부속 도구가 아닌 창조자로서의 손'이라는 부제는 이 책의 그러한 의도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이 만만치 않은 작업에 참여한 필진 14명은 모두 독일인들로 독일 튀빙겐 대학의 의사, 교수, 연구원 등 주로 의과 계통을 전공한 저자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여기에 음악, 심리학, 물리학, 철학,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가세하여 책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

사실 이 책에서 재미있게(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읽히는 부분은 의과 계통이 아닌 인문학 전공자들이 쓴 글들이다.

인류가 진화를 이루어낸 동력은 직립보행 덕에 자유로워진 손에 있었다는 주장은 이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인류학의 기초지식이겠지만, 문화의 전승을 가능하게 한 말과 글의 발명 역시 그 동력은 손에 있었다고 말한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 제작 방식에서 조합 방식으로 진화한 도구의 발달사가 보여주듯이 반복된 손 기술에 의해 축적된 조합적 사고는 중층적 구조와 순서와 조합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인간 고유의 언어행위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언어조차도 손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 글에 붙은 제목이 '태초에 말이 있었다'가 아니라 '태초에 손이 있었다'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수십만 년 동안 인간 진화와 문명 진보의 동력으로 작용한 손은 단지 수천 년에 불과한 역사 시대를 통과하면서 그 지위를 입에 빼앗기고 말았다. 독일 마부르크 대학의 철학교수인 페터 야니히가 쓴 '손 노동자와 입 노동자'라는 글은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글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손과 입의 지위 전도는 육체 작업을 천하게 여겨 노예들에게 맡겨버리고, 자신들은 수학의 정신에 따라 이상 세계를 건설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남긴 유산이다.

그는 손 노동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학문의 정수로 여겨지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합리성을 마련해준 토대임을 명쾌하게 논증하면서, 17세기 고전 물리학 이래로 발전을 거듭한 경험적 자연과학 역시 손 노동을 통한 측정과 실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은 것은 근본적으로 손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의 이러한 주장은 쉽게 납득이 간다. 이것은 학문과 예술을 두루 포함하는 문화(culture)라는 단어의 어원 속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문화란 밭을 경작하는 것(cultivate), 즉 손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완전히 간과되지는 않는다 해도 오늘날 손 노동은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안타깝다. 이것은 가장 창조적인 손으로 여겨져야 할 예술가의 손도 마찬가지다.

르네상스 이후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가 '수공업자'에서 '정신적 창작 활동을 하는 자'로 상승하면서 손과 머리의 관계는 전도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더 이상 수공업적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산물로 팔려 나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조형예술에서 손으로 하는 작업보다 이념의 가치가 더 높이 평가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예술가의 지위를 창조자로서의 신의 위치로까지 끌어 올렸지만 그 이전에 예술가의 손이 누렸던 장인의 지위는 반대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되면서부터 그림이나 조각에 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손의 지위가 하락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전에는 잘 등장하지 않던 손이 예술가의 창조적 정신을 상징하는 소재로서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조형예술의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미술사가가 쓴 '예술가의 손'은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손 뒤집기는 인간의 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숫자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엄지손가락 하나의 물고기'라는 글에서도 반복되는데, 이 글은 이 책을 기획한 장본인으로서 국제적인 무용가이자 안무가라도 활동하고 있는 마르코 베어가 쓴 무척 흥미로운 글이다.

이 글에 의하면, 인간의 양손 10개의 손가락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수 체계인 십진법에서는, 제법 큰 숫자라도 신체의 다른 부분을 이용하거나 집합의 원리를 도입하여 여전히 손과의 관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백만을 넘어서는 수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숫자가 지니고 있던 손과의 관련성은 희미해졌고, '무한'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는 마침내 그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수학적 세계는 이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추상적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 거의 무한한 수학적 계산이 요구되는 사이버 공간을 다루게 되면서 다시 숫자는 손과의 관련성을 회복하게 된다. 수학적 계산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가상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수많은 센서가 부착되어 실제 손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데이터 장갑이기 때문이다.

손과의 관련성을 완전히 상실했던 추상적인 수학 세계는 이제 우리가 데이터 장갑을 끼고 사이버 공간의 물체를 조작하게 되면서부터, 우리의 손으로 만지고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손이 품고 있는 온갖 비밀과 주술들과 상징들을 문화적 관습과 종교적 제례의식, 수상술 및 손금술 등을 동원하여 다채롭게 풀어놓고 있는 '신비로운 손'과 그림형제가 편찬한 독일어 사전에서 손과 관련된 항목을 뽑아내어 손이 상징하고 있는 바가 실제 독일문학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꼼꼼히 분석하고 있는 '손의 상징적 의미'도 재미있게 읽히는 글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처럼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손이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글들은, 이러한 인문학적 시선이 아니라 해부와 임상실험과 통계적 분석에 의거하여 인간의 손과 두뇌의 관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ㆍ고찰한 의과 계통 전공자들의 글들이다.

손은 다른 감각기관들과는 달리 지각의 수단이자 행동의 수단이라는, 즉 행위하는 감각기관이라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로 인해 손은 다른 감각기관들보다 훨씬 더 긴밀하고 직접적으로 두뇌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사고나 수술로 사지의 일부를 절단한 뒤에 나타나는 환상통(phantom pain)이 손을 잃었을 때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손이 지니고 있는 두뇌와의 관련성이 그 어느 신체 기관보다도 더 긴밀하고 직접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고도의 의학 지식과 초정밀 기계공학에도 지금 이 시대의 과학자들이 인간의 손을 닮은 로봇의 인공 손 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손이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물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손이 지니고 있는 이 고도의 정교함과 복잡함은 단순히 신경과 근육과 뼈 구조의 정교함과 복잡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뇌와 협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손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협력 작업을 연주 중인 피아니스트의 손동작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초당 13타의 속도로 피아노를 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1996년판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기계식 타자기 빨리 치기 최고 챔피언의 기록 초당 12.3타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빠른 속도로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면서 섬세한 감정을 실은 강약과 장단까지 표현하는 것이 연주자들의 손이니, 그런 인간의 손을 어떻게 로봇의 인공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손은 단순히 손만의 문제가 아니라 두뇌와의 문제라는 것이 여기서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라는 매우 오래되고도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글을 읽으면 이러한 손과 두뇌와의 관련성은 한층 더 뚜렷해진다.

하지만 '사물의 중요한 측면을 은폐하는 것은 그 단순성과 일상성이다'고 갈파한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의 유명한 말처럼 우리는 자주 손과 두뇌와의 이런 긴밀한 관련성을 잊어버린다.

블루 컬러와 화이트 컬러, 또는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손 노동자와 입 노동자로 직업을 나누는 우리의 오랜 전통 역시, 이처럼 손과 두뇌의 긴밀한 관련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인정을 하더라도 손보다 두뇌를 더 우위에 놓는 우리의 의식구조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비록 두뇌 없이 기능하는 손은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두뇌는 오랜 세월 손의 작용을 통하여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손이 바로 두뇌의 기원이라는, 더 나아가서 육체가 바로 정신의 모태라는 이 책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3.

그러니 <손이 지배하는 세상>의 책장을 덮으며, 땀 흘리기를 싫어하고 거친 흙을 만지기를 꺼려하며 연장을 다루는데 아직도 서툰, 곱기만 한 내 작은 손이 어찌 부끄럽지 않았겠는가!

그런 부끄러움으로 다시 내 손을 들여다본다. 책만 넘기지 말라고, 키보드만 두드리지 말라고 내 손이 소곤거린다. 집 안팎 잘 살펴봐서 손볼 데 있으면 사람 부르지 말고 손수 망치 들고 고쳐보라고 꾸짖으며, 마당에 나가 채소들과 꽃들과 나무들도 더 많이 매만지라고 권한다.

그러다 조금 지치면 먼지 잔뜩 낀 기타를 꺼내 연주도 해보고, 주말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아이를 데리고 나가 함께 그림도 그려보라고 소곤거린다.

그래야겠다. 정말 그래야겠다. 내 손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손을 많이 놀려야겠다.

손이 지배하는 세상 - 정신의 부속 도구가 아닌 창조자로서의 손

마틴 바인만 엮음, 박규호 옮김, 해바라기(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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