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득 푸드득. 까악-까악-
한라산 국립공원 해발 1280m. 영실의 아침은 새들의 날갯짓으로 시작한다. 소나무 숲에서 비상을 꿈꾸는 까마귀 한 마리가 찬이슬을 털어내는 이른 아침, 산행이라는 배낭을 메고 비탈길을 달려온 사람들이 하품을 해 댄다. 차곡차곡 떨어지는 단풍잎 소리에 밤잠을 설쳤나 보다.
10월이 저무는 마지막 주말, 겨울의 초입에 들어간 한라산 영실 휴게소는 찬바람이 싸늘하다. 텅빔의 자유를 누리고 싶을 때는 뭐니뭐니해도 산행이 최고다. 가을 산이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가을 단풍을 헤아리고 싶어서도 아니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험난한 영실 산행 길을 택한 것은, 길을 밟다보면 힘들었던 일상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영실 휴게소에서 발길이 머문다. 늘 구름에 가려, 서 있는 듯 앉아 있는 듯 그 형상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오백나한의 모습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단풍잎으로 누더기 옷을 기워 입은 것처럼 형형색색, 오색단풍으로 몸을 휘감았다. 평소 같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던 나한의 모습이 오늘은 왠지 때때 옷을 입은 것처럼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어머니의 한을 달래기라도 하듯 천년을 기다리는 오백나한의 형상들. 존자는 말이 없는데 단풍잎만 차곡차곡 쌓인다. 보송보송 깔아 놓은 융단 위에 오롯이 서 있는 기암괴석 하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다 죽어 간 오백장군의 하나가 아니가 싶다.
마치 성모마리아 같기도 하고 관세음보살상 같기도 한 내 마음 속 존자. 낭떠러지에 홀로 서 있는 기암의 모습에서 인내를 배우는 순간이다. 소나무로 몸을 가리는 나한의 형상에도 울긋불긋 물이 들었다.
마치 세상의 탐욕을 모두 뒤집어 쓴 내 모습을 뒤돌아보기라도 하듯, 절벽 위에 서 있는 돌부처에게서 그 의미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