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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폭포가 웅장한 물줄기를 내어 뿜고 있다.
용소폭포가 웅장한 물줄기를 내어 뿜고 있다. ⓒ 장동언
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행락객의 편의시설로 마련된 주차장에다 잠시 차를 세워둔 채 나는 폭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더듬었다. 가드레일을 넘어 조심조심 계곡 아래의 심층부까지 내려갔지만 바위가 높고 측면이 휘어져 최하단 부분까지 내려가지 않고서는 폭포를 정면에서 감상하기란 더없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계곡의 중턱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폭포의 물줄기가 겹겹이 쌓인 큰 바위의 중앙을 너무도 쉽게 통과함에 일순 속세의 오뇌를 잊고 만곡의 청신한 쾌감을 만끽하는 듯했다.

그렇게 폭포의 면전에서 감상의 시간은 이어졌다. 그 시간이 끝나자 나의 자동차는 다시 휘어진 계곡의 길을 따라 조심스레 진행을 시작했다.

수도계곡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
수도계곡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 ⓒ 장동언
이윽고 도착한 수도마을, 그곳에는 34가구가 옹기종기 숲 속에 모여 정담을 나누는 듯 아름다운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즈음 보슬비가 내렸는데 사전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관계로 당장 주차장에서부터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곳의 인심 좋은 어르신 한분을 만나 작은 우산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우산을 받쳐들고 수도암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어슬렁 어슬렁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차갑게 와닿는 바람과 함께 길의 중심 좌, 우측이 시원스레 뚫려져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랬다. 왼쪽은 세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차단기가 설치된 임도로의 진입로였고, 오른쪽은 가을날의 정취를 마음껏 만끽하며 청암사로 향할 수 있는 수도암과 청암사를 잇는 산책로 숲길이었다.

수도암과 청암사를 잇는 산책로
수도암과 청암사를 잇는 산책로 ⓒ 장동언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책로를 바라보는 순간 낙엽들을 밟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 치밀어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 숲길로 돌려졌다.

여느 호텔 내부의 은은한 카펫을 밟는 것보다도 더 감각이 좋은 숲길, 그 길을 얼마쯤 거닐었을까. 실바람에 주변의 가랑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니 정녕 혼자서 그곳을 찾은 것이 내심 아쉬움으로 돌아섰다.

명산 수도산의 참나무, 떡갈나무 등 갖은 잡목들로 구성된 숲속에서 홀로 자연에 취해 마음을 놓았다. 그러다가 일순 정신을 가다듬고 왔던 길을 되돌아 본래의 목적지인 수도암으로 향했다.

지난 여름, 울울창창하게 우거져 거대한 터널을 만들었던 나무들이 지금은 하나 둘 옷을 벗은 채 보슬비를 촉촉이 맞고 있었다. 그 길 한켠에도 조금 전 산책로에서처럼 떨어져 누운 낙엽들로 흥건했다.

어느새 수도암이 보였다. 발품 팔아 도착한 절집 아래 주차장에는 오늘 같이 울울한 날에도 각 지역에서 모여든 자가용들이 드문드문 주차장을 지키고 있었다.

주차장 위쪽 채소밭에 심어 있는 푸른 배추와 더불어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을 감상하면서 다시 가파른 길을 따라 올랐다. 그러자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수도암 내 절집들이 조금씩 나의 시야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엄과 엄숙이 교차되는 가운데 어디선가 "땡그랑 땡그랑"하는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천년을 거슬러 오르는 나와 수도암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수도암은 수도산(해발 1317m)의 상부에 위치한 도량(해발 1080m)이다. 신라 헌안왕 3년(859) 도선국사가 이곳을 돌아보고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산과 도량 이름을 각각 수도산, 수도암이라 칭했다고 전한다. 유래에 따르면 이곳을 창건한 도선국사는 수도암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한다.

수도암 맨 아랫부분에 터를 잡은 까닭으로 인하여 사람들과 가장 먼저 만나는 관음전. 그러나 오래 전 사무실겸 요사채로 사용되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수도암의 은은한 선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관음전을 지나 다시 돌계단을 밟고 중간쯤 올라서니 이번엔 수도산 산행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수도산의 등산 진입로에 설치된 키작은 다리
수도산의 등산 진입로에 설치된 키작은 다리 ⓒ 장동언
만약 날씨만 좋았다면 1시간 정도 소요된다는 수도산 산행도 강행했을 텐데….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탓에 아쉬움을 접고 오르던 돌계단을 계속해서 내딛으며 올랐다.

마지막 돌계단 하나를 막 밟고 오르자 나의 눈은 2개의 3층 석탑과 지형을 상징한 석물과 마주쳤다. 그것들은 천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이 말해주듯 희끄럼하게 퇴색되어 군데군데 이끼마저 무성했다.

대웅보전이라고도 하는 큰 법당
대웅보전이라고도 하는 큰 법당 ⓒ 장동언
실상 석탑 뒤의 큰 법당도 선의 조형과 색조의 미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웅대한 위용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약광전(藥光殿)에 이르러서는 그 신비로움에 한참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천년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약광전
천년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약광전 ⓒ 장동언
이유인즉 그곳에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석불좌상(石佛坐像)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석불좌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갖추고 있었고, 단아한 얼굴에 머리에는 원통관(圓筒冠)을 쓰고 있었다. 또한 통견(通肩)의 옷주름은 도식적이며 두 손은 법계정인(法界定印)을 취하면서 보주(寶珠)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광배는 거신광(擧身光)으로 연화문(蓮華紋), 당초문(唐草紋), 화염문(火焰紋) 등을 새겼고, 대좌 상대(上臺)는 앙련(仰蓮)을, 중대(中臺)는 안상(眼象), 하대(下臺)는 복련(覆蓮)을 조각한 방형대좌(方形臺座)를 보여주고 있었다.

수행자의 선당 조사전
수행자의 선당 조사전 ⓒ 장동언
그렇게 두루두루 수도암을 돌아보자 어느새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산 속에서는 날이 빨리 어두워진다고, 으스스 다가오는 한기에 몸을 맞대며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빗속에서의 수도암 감상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얘기를 하며 돌아서 내려왔다. 그러나 짧은 여정의 아쉬움 때문인지 나의 고개는 자꾸만 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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