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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정자 문화를 대표하고 있는 농월정(弄月亭).
ⓒ 김길순
우리나라 정자문화 대표

시와 문을 주고받으며 우리나라 선비문화를 상징하던 정자, 그 중에서도 백미인 농월정(弄月亭)이 드디어 복원된다.

농월정은 우리나라의 정자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 정자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의 '팔담팔정(八潭八亭)'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자연의 미를 갖춘 화림동(花林洞) 계곡에서, 달을 담아내고 있는 작은 웅덩이를 품고 있는 월연암을 내려다보며 소나무 숲을 등지고 세워졌다.

더구나 반석 위로 물이 흘러 그 앞에 탁 트인 화강암은 그들의 어깨뼈를 푸른 하늘로 힘차게 드러내 놓는가 하면, 계곡에서는 그의 맑은 이마에 온갖 모양의 구름을 흐르게 한다.

▲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화림동(化林洞) 계곡에서 바라본 불타기 전 농월정 전경. 안의삼동이란 안의에서 산수가 수려한 3곳 명소를 말하는 것으로 화림동 계곡과 용추계곡의 심진동(尋眞洞), 그리고 원학동(猿鶴洞)을 말한다. 원학동은 1914년 안의군이 페지되면서 거창군 위천면에 속하게 됐다.
ⓒ 함양군청

▲ 농월정(弄月亭) 현판. 농월정이란 '달을 희롱하며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다.
ⓒ 함양군청
29일 경남 함양군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된 농월정을 복원하기 위해 우선 1억5000만원의 예산안을 편성, 군의회에 제출했다. 농월정 복원을 위한 사업비는 총 3억원 가량 예상되며 사업기간은 내년 12월까지다.

농월정이 있던 곳은 현재 박씨 문중 소유의 사유지어서 공공건물 건립이 불가한 상태다. 이로 인해 이 정자는 학사루(學士樓), 광풍루(光風樓), 함화루(咸化樓)와 달리 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복원에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군은 정자가 속한 임야를 문중으로부터 희사 받거나, 복원건립 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추진위가 50%를 부담할 경우 군에서도 건립비용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문중에서도 농월정 복원을 위한 대표 전체 회의 소집을 의결하고 곧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 지난 2003년 10월 5일 오후 7시 30분쯤 방화로 추정되는 불로 인해 전소된 농월정.
ⓒ 이영철

▲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흉칙하게 불타버린 농월정의 잔해.
ⓒ 이영철
고증 통해 제대로 복원해야

함양군 문화관광과 정대훈 계장은 "농월정은 우리나라 정자문화를 대표하고 있고, 현재까지도 이곳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출시되고 있다"며 "군민과 출향인 뿐만 아니라 경남도, 전국에 걸쳐 정자를 복원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계속 접수되고 있어 선비문화와 관광자원 활성화원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함양시민연대 엄용식 상임대표는 "농월정은 남덕유산의 참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차가운 본성으로 돌과 돌 사이를 부딪치며 굽이굽이 돌아드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며 "달빛은 맑은 물결에 일렁이며 정자에 기댄 선비와 농을 주고받았다"며 복원소식을 몹시 반겼다.

농월정, 제대로 된 복원만이 정자를 사랑하고, 선비의 기개와 결기를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임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농월정은?

정자는 깨끗한 물소리가 끊이지 않고, 솔 내음 품은 소슬한 바람이 항상 그윽해야 한다. 맑은 물에는 마음을 씻고, 소슬한 바람에는 땀을 씻어야 한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예조참판과 관찰사를 지낸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낙향해 1637년 처음 초가로 건립되었으나 현재 불타버린 누각은 몇 차례 중건을 거쳐 1899년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2003년 10월5일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다.

정자는 12평의 목조건물로 뒤쪽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바람막이 작은 방을 둔 정면 3칸, 측면 2칸 누각으로 팔각지붕이며 추녀 네 귀에 활주를 세웠다. 또 걸터앉거나 기댈 수 있도록 세 면에다 계난간을 둘렀다.

농월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비단내(현재의 금천)를 마주하고 있어, 물이 차도 지장이 없도록 기둥을 받쳐 주는 12지주는 모두 밤나무로 만들었고, 상판만 소나무다. 밤나무는 물이 차도 기둥을 썩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또 농월정으로 흐르는 물이 비단처럼 아름답기 때문에 안의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사람들은 비단내, 금천이라 불렀다. / 이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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