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저녁 7시 향린교회에서는 의미있는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43년 전 5·16 쿠데타세력에 의해 억울한 사법살인을 당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증보판 평전(<조용수와 민족일보>)이 전 민족일보 기자들과 혁신계 인사들 앞에 선을 보인 것.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조용수 사장의 친동생인 조용준씨도 참석해 "그동안 민족일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힘써준 인사들에게 감사하다"고 참석자들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오마이뉴스>는 지난달 29일 서울 태평로 소재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 사무실에서 조용준씨를 만났다. 민족일보 기획부장을 지내기도 했던 조씨는 "당시 기자들에게 마지막 월급도 못주고 헤어졌다"며 "경영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죄의식으로 남아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돈을 줬다는 이영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의 간첩여부는 논할 필요 없어"
조씨는 당시 민족일보의 위상에 대해 "처음 2만부를 찍다가 마지막엔 4만5000부 찍었다"며 "4만5000부 중 4만부가 가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고 회고했다. 당시 가판판매에서 1위를 달렸다는 것.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김자동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장(전 민족일보 기자)은 "<조선>과 <동아>는 가판 판매비율이 낮았다"며 "정치인들은 매일 민족일보 가판을 보며 혹시 자신에 대해 안좋은 얘기가 실리지 않았나 살피곤 했다"고 증언했다.
조씨는 "형님(조용수 사장)은 성질이 급한 편이었지만 가정적이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겐 효자였다"며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고 노동자 권익 보호 등을 사시로 내건 민족일보를 창간한 걸 보면 형님은 진보주의자였다"고 조 사장을 평가했다.
조씨는 특히 혁명재판부의 간첩자금 유입 주장에 대해 "하나에서 열까지 조작됐다"며 "돈을 줬다는 이영근에게 군사정권이 훈장을 줄 정도라면 그의 간첩여부는 논할 여지가 없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조씨는 "이영근뿐만 아니라 윤길중, 고정훈, 송지영 등 민족일보 창간 멤버들이 민족일보 사건 이후 모두 벼슬을 했다"며 "이 사건이 정권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으니까 박정희 정권이 이들에게 벼슬을 주고 회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씨는 "박정희가 자신의 좌익전력을 숨기고 자신이 반공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혁신계에서는 최백근, 언론계에서는 조용수 등을 처형시키지 않았나 싶다"며 "민족일보 사건은 박정희가 자신의 레드콤플렉스 때문에 저지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씨는 "재심 청구는 유족의 권리지만 인적구성상 대법원이 이 사건의 재심을 수용할 것 같지 않다"며 "과거사 진상규명법이 국회에 계류중이기 때문에 추이를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조용준씨와의 인터뷰 전문.
"공개되지 않은 재판기록 국정원에 있을 것"
- 최근 과거사 청산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유족으로서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그때 재산과 생명 다 빼앗긴 것 아닌가. 당시 기자들 마지막 월급도 못주고 헤어졌다. 그것이 죄의식으로 남아 있다. 경영했던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미안할 따름이다. 우리 사건이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되면 좀 덜 억울할 것이다. 지금 국회에서 법안이 계류중이니까 추이를 두고볼 생각이다."
- 조용수 사장이 왜 사법살인을 당했다고 생각하나.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황스럽다. 저는 거기에 대해 정치적 해석을 할 처지는 못된다. 간첩의 돈을 받아 신문사를 창립하고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통일에 동조했다는 것이 주된 죄목이었다. 그런데 돈을 댔다는 이영근은 노태우 정권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특히 윤길중, 고정훈, 송지영 등 민족일보의 창간멤버들이 그 사건 이후 벼슬을 했다. 그런 과정을 볼 때 혼란스럽다.
조 사장이 정치적으로 혁신계열인지 우익계열인지 판달할 자신은 없다. 다만 짧은 세월 동안의 행적을 보면 다분히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되도록 정의의 편에 서려고 했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미화가 아니라 그의 행적으로 나타난다."
- 사법살인의 배후는 누구라고 보는가.
"박정희에게는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여순반란사건 때 남로당 군책으로 있었고 김창룡한테 잡혀가 죽기 직전에 살아났다. 그는 동지들을 다 불고 살아남았다. (박정희의 좌익전력 때문에) 미국이 한동안 그를 의심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 전향했다, 당신들 못지 않게 반공주의자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혁신계의 최백근, 언론계의 조용수 등을 대표적인 케이스로 처형시키지 않았나 싶다. 조용수 사건은 박정희가 자신의 레드콤플렉스 때문에 저지른 것이다."
- 조용수 사장의 재판기록이 거의 공개되지 않았는데.
"2심 판결문밖에 없다."
- 왜 재판기록이 공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알 도리가 없다. 조 사장의 진술내용을 보고 싶어 요로에 진정도 하고 신청도 했는데 뺑뺑이 돌리더라. 전부 없다고 한다."
김자동 위원장 "중정에서만 가지고 있고 다른 기관에 있는 것은 다 회수했던 것 같다."
- 조용수 평전의 저자인 원희복 <경향신문> 차장은 국정원에서 재판기록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증보판의 표지를 보면 조 사장의 사형 직전에 찍은 사진이 있다. 이것은 예전에 <월간조선>이 공개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에 국정원 도장이 어렴풋이 찍혀 있어 재판기록도 국정원에 있을 것이라고 원 차장은 추리한 것이다. 이 사진을 표지에 쓰려고 월간조선에 문의하니까 자기들도 입수 경위는 모른다며 MBC에서 나온 것 아니냐고 둘러댔다. 하지만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는 이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월간조선 쪽에서 (입수경로를 알고 있으면서) 둘러댄 것 같다."
<월간조선>이 공개했던 조 사장 사형직전 사진의 출처
- 조용수 사장은 어떤 분이었나.
"성질은 좀 급한 편이었지만 효자였다. 부모님과 형제한테 잘했고 가정적이었다."
- 조용수 사장은 일본에 있을 당시 음악잡지에 음악평을 쓸 정도로 클래식을 좋아했다고 하던데.
"당시 일본에 '풍월당'이라는 음악실이 있었다. 조 사장은 학교가 끝난 후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베토벤에 대한 음악평론을 썼는데 그게 <아시히신문>에 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구하진 못했다. 민족일보에 있을 때도 종로2가의 희다방 위에 '르네상스'라는 음악실에서 클래식음악을 들으며 머리를 식히곤 했다."
- 조용수 사장은 사상적으로 우익인가 좌익인가.
"당시 혁신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민족주의자가 많았다. 조 사장은 사회대중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이것만으로도 조 사장이 혁신적인 인사라고 볼 수 있다. 또 4·19 혁명 공간에서 신문사를 설립하고 노동자 권익 보호 등 네가지 사시를 내건 것을 보더라도 조 사장이 진보주의자였던 것 같다."
- 학창시절과 일본시절을 보면 '우파 민족주의자'의 성향을 보였던 같다.
"일본에서 생활할 때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조 사장은 민족주의에만 갇히지 않았다. 그가 5·16 군사쿠데타가 난 뒤에 탐독하던 책들을 보면 사회주의 경향 서적들이 많았다. 그것 때문에 말썽이 생기기도 했다."
- 조 사장은 어떻게 진보적인 민족일보 창간에 참여하게 됐나.
"조 사장은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선이 되면 원내에서 제대로 된 의정활동을 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그러자 일본으로 다시 들어갔다. 동경에서 이영근, 박영구, 이희원 등 4·19혁명을 사회변혁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일본의 우국지사들이 낙선하고 돌아온 조 사장을 위로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조 사장은 직접 보고 느낀 국내의 실정을 얘기하고 토론했을 것이다.
혁신계나 민주세력을 규합하고 이들을 사회에 알리는 매체가 없다는 현실을 알고 신문사 창간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제안을 그분들에게 하고 동의를 얻어 민족일보를 창립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간판만 없었지 조용수 후원회가 결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이영근이 간사역할을 했고 재력가인 박용구 선생이 돈을 댔을 것이다. 박 선생은 조 사장에게 준 돈 때문에 망했다는 소문이 동경에 자자했다.
박 선생은 넝마주의를 하는 등 고생을 무지 했던 사람이다. 부동산업으로 돈을 모았다. 한때는 이병철보다 재산이 많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재력가였다. 조 사장이 비운에 간 이후에 공화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박 선생을 접촉했다. 공화당 재정국장으로 초빙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박 선생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 일본 교포사회에서 조 사장에 대한 신뢰가 꽤 깊었던 것 같은데.
"우국지사의 정신과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전위병으로서 조 사장을 선택한 것 같다.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조 사장이 대신 할 수 있도록 앞에 내세운 것이다. 민단의 기관지인 민주신문 논설위원을 지냈고 청년운동도 쉬지 않고 해왔으니까 교포사회에서 신망을 얻었을 것이다."
- 조 사장은 왜 민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총련계라는 누명을 쓸 수밖에 없었나.
"조 사장을 처형하고 민족일보를 폐간시킨 그 사건의 내용이 하나에서 열까지 조작이다. 이영근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신문을 창간했다는 등의 죄목들은 다 깨졌다. 특히 이영근이 군사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을 정도라면 그의 간첩 여부는 논할 여지가 있겠는가. 이영근에게 그런 훈장을 줄 수밖에 없는 정권 차원의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
- 이영근은 어떻게 변절한 것인가.
"이영근이 간첩이라면 전향을 해야 훈장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절차가 없었다. 박정희가 일간지도 운영하게 해주고 빌딩도 사게 해주고…. 악의적으로 생각하면 (이영근의 변절은) 조용수 사건의 입막음용으로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수작이었다고 추리할 수 있다. 정권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사건이니까 창간멤버들에게 벼슬을 주고 회유한 것이다."
- 가장 중요한 증인인 이영근은 왜 재판장에 출석하지 않았나.
"당시 증인신청을 했지만 다 기각됐다.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대체 그런 형사재판이 어디 있나."
- 조 사장은 일본에서 귀국한 직후 사회대중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는데 원래 정치에 뜻이 있었던 것인가.
"정계진출의 욕구가 있었다. 조 사장은 일본에서 주일공사 유태하 추방운동을 벌이면서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를 혐오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불의에 대한 항거를 시작한 것 같다. 이후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하는 진보당 사건이 일어나면서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가이고 해방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분이라고 얘기했다."
"민족일보는 조선과 동아 등이 시기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
- 당시 민족일보는 잘 팔렸나.
"당시 동아가 7~8만부 나갔다. 민족일보는 희망사에서 처음 2만부를 찍었는데 이후 2~3만부에서 왔다갔다 했다. 그런데 발행부수의 80%를 가판에서 판매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4만5000부까지 찍었다. 이중에 4만부가 가판이었다. 정말 불티나게 팔렸다."
김자동 "조선과 동아의 경우 가판판매비율이 낮았다. 당시 민족일보가 가판판매 1위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치인들은 매일 가판을 보며 혹시 자신에 대한 나쁜 얘기가 나왔나 살피곤 했다. 당시 김영삼 야당 대변인도 '빨리 민족일보 가판 사오라'고 시키곤 했다."
- 민족일보가 그렇게 가판에서 잘 팔렸던 이유는 뭔가.
김자동 "당시 시대상황에서 할 말을 하는 신문은 민족일보가 유일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높았다. 해방 이후 여론조사에서 60% 이상이 사회주의를 선호하지 않았나. 지식인들은 물론이고 신문을 보는 일반인 정도면 대체로 지금보다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 반공 우익의 선전에 알게 모르게 중독이 됐다."
- 장면 정권에서 일어난 인쇄중지 등 언론탄압에 대해 다른 신문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이유는?
"당시 침묵에 가까웠다. 동업자로서의 상도의도 없었다. 시기심이 강했고 민족일보를 왕따시킬려고 작정한 것이다. 민족일보가 급부상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 당시 조용수 사장은 유독 논설에는 개입한 것 같은데.
"통일 관련 사설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원래 글쓰는 것을 좋아했다. 민족일보 창간사는 조 사장이 직접 썼다."
- 민족일보는 사실상 혁신계의 기관지 아니였나.
"(기관지라는 평가에 대해) 수긍할 수 없다. 특정 정당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다."
김자동 "기관지는 아니지만 혁신계를 대변한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민족일보를 사회대중당(사대당)의 기관지로 얘기하는 것은 잘못됐다. 사대당은 4·19 직후 창당돼 혁신계 인사들의 반 이상이 이곳에 집결했다. 조 사장도 사대당 공천을 받아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석했다. 이후 혁신계의 재정비가 있었다. 보수적인 사람은 통일사회당(통사당)으로 집결하고 좀 앞서간다는 사람은 혁신당이나 사회당으로 모였다.
사대당은 다 쪼개져 김달호가 간판만 움켜쥐고 있었다. 당시 당원이 20명도 안됐다. 조 사장이 사대당에서 떨어져 나간 것은 다 아는 얘기다. 당시 민족일보는 사대당과 연관이 없었다. 사회당이나 통사당, 민자통 등은 창간 축하광고를 냈지만 사회대중당은 광고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 민족일보는 폐간사도 없이 사라졌는데.
김자동 "폐간 절차를 밟을 겨를도 없었다. 신문재산 빼앗아 가고 사람들은 잡아가고…."
김자동 "1심 판결에 참여한 이회창 전 총재는 비겁한 사람"
- 조용수 사장은 5·16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에 대해 처음엔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심지어 "군사혁명위원회의 혁명과정 수행에 더 많은 영광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는 사설을 싣기도 했는데.
"조 사장은 당시 고정훈한테 5·16 사태에 대해 물었던 것 같다. 고정훈은 해방 이후 군계통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 역시 박정희에 대해 낙관했다. 조 사장이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알고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김자동 "5·16 쿠데타 직후 고정훈이 낙관적인 얘기를 했다. 그런데 5월 17일쯤 되니까 심각하게 얘기하더라."
- 조용수 사장은 박정희가 사형까지 시킬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사형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종로서에 수감됐다가 중부서로 이감됐는데 당시 최달희라는 참의원이 구속중이었다. 그가 탈장증세가 있어 조 사장이 그를 업고 나가서 치료받고 다시 들어왔다. 큰 죄를 지었다면 그때 도망가버리지 다시 들어왔겠나. 그때 면회를 가보니까 '이승만이나 장면보다 박정희가 더 잘하지 않겠나'하는 눈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엔 금방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엔 '이게 간단하지 않구나' 하며 심각해졌다. 박정희가 그렇게 악독한 놈인지 몰랐던 것이다."
- 두번의 대선이 치러지는 동안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1심 판결에 참여했던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김자동 "이회창 전 총재가 제대로 해명한 일이 없다. 비겁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대쪽'이란 호칭은 <조선>에서 만든 것이지 그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자기 행적에 대한 제대로 된 자기의 의견이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민족일보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꽁무니를 뺐다."
- 무덤에 계신 형님은 현재 어떤 심정일까.
"자기 살려 내라고 할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겠나. 기가 막힌 일이었다."
- 재심을 청구할 것인가.
"재심은 우리 유가족의 권리다. 그런데 얼마 전 헌재 판결을 보니까 우리 사건 서류를 받아줄지 의문이다. 인적구성상 대법원이 재심을 수용할 것 같지 않다. 인혁당은 상당한 세력과 여론을 업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아직도 법원에 계류중이다. 재판기일이 안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