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에쿠니 가오리 소설 <웨하스 의자> 표지
ⓒ 소담출판사
애인이 오지 않는 날, 나는 종종 밥 먹는 것을 잊어 버린다. 기억은 해도 귀찮아서 잊어버린 척하고 만다. 어렸을 때처럼, 애인이 없을 때, 식사는 그저 의무에 지나지 않는다. - <웨하스 의자> 117쪽에서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더불어 일본의 3대 인기 여성작가로 불린다는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2001년 발표작인 <웨하스 의자>가 이달에 소담출판사에서 나왔다. 하드 커버로 단단하지만 예쁘게. 그녀의 청초한 얼굴도 '에쿠니 가오리의 달콤한 설레임, 그 일곱 번째'라는 카피와 함께 오렌지색 띠에서 반짝이고 있다.

소담출판사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만 벌써 다섯권째 펴냈고, 내놓을 때마다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전동차 안에서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고 있는 젊은 여성이 더러 눈에 띈다. 한 출판사에서 한 작가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펴낼 때 작가와 출판사 양쪽 모두가 독자에게서 탄탄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듯. 게다가 김난주씨가 대부분 번역하였으므로 한 작가의 문체가 각 편마다 울퉁불퉁거리는 일이 드물어 좋다.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그 무엇이 꽤 많은 한국 여성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것일까.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여러 권을 한국판으로 만들어낸 편집자 구경진씨는 "각 편마다 주제는 달라도 '이건 이것이다'는 식으로 극단적으로 구워 놓지 않고 사랑을 아름답게 보려고 하는 시선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현실의 본질적인 고독과 결핍, 그리고 소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에쿠니 가오리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끊임없이 사색하는 문체가 강점이다. 어느 문장, 어느 단락 하나 놓치면 그녀의 소설이 지닌 참맛을 못 볼 수 있다. 심지어 상징적인 명사 하나까지도 놓쳐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한데 모아져 등장인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설득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문체는 쉼표가 많고 짧지만, 아주 강하다. <웨하스 의자>에서 '나'는 유부남과 함께 불륜의 사랑을 하지만 끊임없이 돌이켜보는 그녀의 성장 과정에서 나는 "그럴 만하다"라고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불륜의 상대인 유부남 애인을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하고 죽으려고 한다. 하지만 손목을 벤다거나 목을 매단다거나 하는 식의 극단적이고 처절한 자살 시도가 아니라 얌전하고 무기력하게 죽음으로 도달하려는 행위를 그려 놓은 것도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다시 만나게 되는 유부남 애인. 그 절망(=유부남 애인)과의 만남을 에쿠니 가오리는 이렇게 그려놓았다.

애인은 병원에서 나온 나와 함께 맥주가 아니라 차가운 재스민 차를 마시며 되물었다.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내가 있는 장소로. 있어도 좋다고 말해주는 장소로. 여름 휴가는 카프리로 가자, 고 애인과 계획을 짜고 있다. - <웨하스 의자> 243쪽에서

그렇다면 <웨하스 의자>라는 지극히 부드럽고 바삭바삭한 제목이 상징하는 건 무엇일까? 웨하스란 과자는 매우 부서지기 쉬운 녀석이다. 그렇게 불안정한 얇은 과자 두 장의 사이에는 달콤한 크림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달콤하더라도 그 크림조차 불안정하다. 언제 과자가 부서져 버릴지 모르므로.

이미 떠나버린 사람들을 떠올리며 걸핏하면 죽음을 생각하는 여자와 유부남과의 불안정한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은 불륜이어서 '절망'이더라도, 여전히 '사랑'일 뿐이다. '간통'이어도 그들의 '사랑'이 식지 않는 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불륜 행위에 구태여 화를 낼 것도 없게 만드는(유부남의 아내를 등장시키지 않는 등) 에쿠니 가오리의 독특한 구성과 전개, 이것이 그녀의 소설을 봄날의 양지처럼 따뜻하게 만들고 그 자리에 독자들이 노란 병아리처럼 앉아 행복하게 오수를 취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에쿠니 가오리 마니아로서 그녀의 소설을 모두 읽으려고 할 때는, 한국어판 출간 시기 순서보다 일본에서 출간된 순서대로 읽으면 작가의 세상 관찰과 주제 변화, 그리고 작풍 변화, 아울러 그에 따른 깊은 속을 이해하는 데 한결 속도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1991), <낙하하는 저녁>(1996), <냉정과 열정 사이>(1999), <호텔 선인장>(2001), <울 준비는 되어 있다>(2003) 순서다. 지난 9월에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수필집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도 1997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으니, <낙하하는 저녁>과 <냉정과 열정 사이> 사이에 넣어 읽으면 작가의 내면과 대화하는 데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웨하스 의자

, 소담출판사(2004)

이 책의 다른 기사

더보기
절망이 곧 사랑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