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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성 위에 지어진 서울 시장 공관
서울 도성 위에 지어진 서울 시장 공관 ⓒ 황평우
서울 도성 위에 자리잡은 서울시장 공관

일제의 서울 성곽 파괴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지만, 1940년 혜화문 옆의 도성 위에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 아직도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서울시의 수치이다. 서울 도성은 1963년 사적 제10호로 지정됐고, 서울시는 1973년부터 서울 도성 복원 계획을 세워 성곽 복원을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성곽 위에 자리잡은 서울 혜화동 소재 서울시장 공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목조 건물로 1959년부터 1979년까지는 대법원장 공관으로, 1981년부터는 서울시장 공관으로 쓰여 왔다. 최근 서울시는 아차산 유적을 복원한다. 청계천을 역사 문화 복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서울시 수장의 공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료 주차장으로 쓰이는 중명전

서울 도성 파괴와 아울러 일제는 조선의 가시적·정신적 상징인 궁궐도 훼손하기 시작했다. 창덕궁에 불을 질러 놓고, 복원해야 한다며 경복궁 건물을 철거했다. 즉 이중의 파괴를 자행한 것이다.

경희궁을 파괴하고 일제의 상공인들 자손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옛 서울고)를 만들었고, 창경궁을 한낱 놀이공원인 동물원, 식물원으로 둔갑시켰다. 또한 덕수궁에 불을 질러 고종을 겁박했다. 당시 불을 질러 훼손된 덕수궁을 대신해서 고종은 중명전에서 집무를 보게 된다.

중명전
중명전 ⓒ 황평우
중명전은 1900년 건립 후 궁중 부설도서관으로 사용됐고 고종의 외교사절단 접견장과 연회장 역할도 했다. 1904년 덕수궁 화재 때 중명전 2층도 불에 탔지만 당시 고종은 이곳으로 옮겨와 1907년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3년간 기거했다.

1905년 11월 17일 중명전은 살벌했다. 작은 마당은 무장을 한 일본 군인들로 가득했다. 고종 황제는 중명전 집무실에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마주하고 있었다. 일본공사는 을사 5적(賊)이 체결한 을사조약에 인준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고종은 끝내 인준을 거부했다.

중명전은 담 하나를 사이로 미국영사관과 이웃하고 있었는데 마침 미국 영사관의 직원이 담 너머로 이 광경을 전부 지켜 보았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곧 본국에 을사조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뤄진 불법적인 조약임을 보고했다.

순종이 태자일 때 태자비를 간택하고 순종이 영친왕을 황태자로 선포한 현장도 이곳이었다. 당시 러시아풍의 아치형 창문과 중앙 로비에 설치된 둥근 기둥들이 왕실의 위엄을 더했고, 한단 높은 곳에는 황제가 앉는 금색 옥좌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일제 때 화재가 난 부분이 복구된 후 어느 틈에 개인 소유가 되어 버렸는데, 1983년 뒤늦게나마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중명전은 대지 721평, 연건평 227평(1층 121평, 2층 106평) 규모인데, 재래식 붉은 벽돌담은 부식 방지를 위해 흰 페인트칠이 돼 있다. 2003년 서울시가 근·현대사 자료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물·토지 감정 평가(49억7300만원)를 마치고 시의회의 매입 승인까지 얻었지만 서울시는 이 계획을 취소해 각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현재 문화관광부 소속의 정동극장이 매입해서 단원 대기 장소와 교육장소로 쓰기 위해 리모델링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며칠 전 찾아간 중명전의 관리 상태는 엉망 그 자체였다.

주차장으로 전락한 중명전. 사진은 지난 여름에 찍은 것이다.
주차장으로 전락한 중명전. 사진은 지난 여름에 찍은 것이다. ⓒ 황평우

중명전의 마당은 '유료주차장'으로 변해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차하기 편한 장소 정도로 인식되고 있고, 얼마 전까지 개인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흔적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마시고 난 후의 술병까지 보였다.

중명전 마당은 문화재위원회의 아무런 '현상변경' 허가도 없이 유료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으로 정부 소유 재산인 중명전은 서울시 지정 문화재이기 때문에 구조를 변경하고 싶어도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로부터 현상 변경을 승인받고 시행해야 할 형국이 되어 버렸다.

최근 중명전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시민사회의 여론이 뜨거워지고 있다. 국회도 시민 사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제 침략 역사 자료관'으로 전환하자는 결의안을 내기도 했다.

아픈 역사, 기념이 아니라 기록을

사회가 안정되고 성숙해짐에 따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요구도 심화된다. 이제 우리도 아픈 역사를 무조건 지우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잘 보존해서 후세에 교훈으로 삼게 해야 할 방안이 필요할 때이다.

또한 건축물도 문화의 일부로 볼 때, 일제 시대나 해방 후 혼란기의 건축물을 무조건 철거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맥을 끊는 것이다. 유서 깊은 도시의 아름다움은 켜켜이 내려 앉은 시대의 나이테 속에 있다. 아픈 과거가 묻어 있는 건축물이라 해도 그것을 잘 보존하여 교훈으로 삼는 보다 성숙한 자세가 필요할 때다.

자유총연맹의 기단이 되어 버린 태조 이성계 시기의 서울 도성 돌
자유총연맹의 기단이 되어 버린 태조 이성계 시기의 서울 도성 돌 ⓒ 황평우
많은 근대건축물과 근대문화유산이 수탈의 상징, 재산권 방해라는 이유로 사라지고 있다. 무작정 철거하는 비문화적, 몰역사적 사태를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건물을 철거할 때 '철거허가제'를 과감히 도입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처럼 과도하고 천박하게 사유재산권이 보장받는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국보나 보물, 가격은 얼마나 하겠는가만 생각하지만, 정반대의 것도 있다. 이를 부(負) 문화유산, 즉 '네거티브 문화유산'이라고 하는데, 인류의 과오를 보여 주는 장소와 건물, 특정 민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건물이나 장소(청태종에게 항복했던 삼전도비, 수탈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등 일제가 세운 건축물)를 말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르샤바 역사 지구, 히로시마 원폭 돔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인류 역사상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기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유명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친일화가 고희동 가옥, 친일과 권력주변의 해바라기였던 미당 서정주의 양옥집, 친일파 지식인 이광수의 고택 등을 보존하자는 것은 그 집과 사람들을 '기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자는 것이다. 즉 '기념관'과 '기록관'을 분명히 구분하고 당사자들의 모든 '공과'를 기록하여 역사교육의 자료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차라리 중명전 1층은 '일제 침략사 사료전시관'으로 활용하고 2층은 친일문제와 과거사 사료의 탁월한 연구를 하고 있는 민간연구 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에게 위탁 관리하면 어떨까?

우리는 흔히 "반일, 반일"하지만 이제는 극일을 할 때다. '을사조약', 그 비극의 현장을 일제침략사를 연구, 기록하는 과거사 정리 연구의 메카로 만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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