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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청원 생명쌀 대청호 마라톤 대회에서 필자(왼쪽)
제2회 청원 생명쌀 대청호 마라톤 대회에서 필자(왼쪽) ⓒ 김옥희
어려서부터 유난히 잔병치레를 많이 한 나는 운동보다는 책읽기를 더 좋아했다. 여동생은 남동생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뜀박질도 하고 배드민턴도 치고 하는데 나는 도통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기운이 없어 움직이기를 싫어했던 것 같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여동생이 선머슴처럼 보여서 오히려 얌전히 있으라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쏘다니며 썰매와 스케이트 타기, 연날리기 등으로 겨울을 보냈다.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는 동생들이 많이 부러웠다. 나는 행여 바깥바람이라도 쏘이면 감기라도 걸릴까봐 방 안에서 겨울을 보냈다.

운동과는 거리가 멀던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직장에서 등산을 가게 된 것이다. 여러 조로 나누어 교직원 등반대회를 갖게 돼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산 중턱에 오르니 숨이 차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데 나 때문에 우리 팀이 뒤처지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결국은 같은 팀 동료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산을 오르게 되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 우리 조가 일등을 했다.

처음으로 산에 오른 쾌감에 기념촬영까지 잊지 않았다. 비록 도움을 받긴 했지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조금 생겨났다. 그 후로 자주 산을 오르내리며 등산의 참맛도 알게 되었고 조금씩 체력이 좋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친김에 달리기를 해 보고 싶어졌다. 나약한 몸이긴 했지만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에서는 맨 앞을 꼭 달렸던 기억이 있었다. 마침 전국적으로 달리기가 유행처럼 번지는 시기여서 거리에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달리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달려야 운동이 되는지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보고 운동화를 구입했다.

혼자 열심히 달리기 연습을 한 지 일 년쯤 되어 처음으로 마라톤대회에 신청을 했다. 내가 달릴 거리는 5킬로미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데 그때는 두렵고 멀게 느껴져 겁이 났다. 비록 달리다 걷다 했지만 결승점에 들어서는 그 순간의 기쁨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마라톤 코스는 해를 거듭하며 5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로 늘어났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10킬로미터를 신청했다. 새벽운동을 하러 다니는 나는 마라톤대회에 가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운동을 하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운동에 재미를 들이던 터라 하고 가기로 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한 후 아침도 못 먹고 되짚어 '청원 생명쌀 대청호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대청호로 향했다.

길가에는 때 이른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고 하늘에는 대회 진행용 헬리콥터의 날개 소리가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비슷한 복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하러 모였다고 생각하니 겁도 났고, 준비운동을 하며 여기저기서 기합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니 저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드디어 출발신호가 울리고 여러 사람 틈에 끼여 나도 부지런히 뛰었다. 3킬로미터쯤 뛰어갔을까. 숨이 차고 힘들어 걸을까 생각하는데 같이 간 지인이 힘내라며 재촉을 한다. 빠른 걸음 정도로 달리기를 하는데 어디에선가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던 그 방울소리는 나를 앞질러 가는 두 분을 연결한 끈에 매단 방울소리였다. '하나, 둘' 구령을 붙이며 뛰어 가는 모습을 살펴보니 한 분은 앞을 못 보는 남자분과 여자분이었다.

구령과 함께 "지금부터는 약간 언덕이야", "내리막길이야" 식으로 안내를 하며 여자 분이 함께 뛰고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걷다시피 달리기를 하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뛰고 있는데 나도 있는 힘을 다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힘들만 하면 들리는 방울소리에 다시 뛰게 되고 반환점을 돌아서서 오르막길에서도 계속해서 내게 순간적인 힘이 되어줬다. 더군다나 여기저기에서 그 분들을 촬영하느라 길가에서 사진기를 들이대는 분들이 있어 나까지 덩달아 더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결승점에 도착할 즈음 혼신의 힘을 다해 뛰는 내게서 안타깝게도 방울소리는 멀어져 갔다.

결승점에서 기다리던 지인의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에는 아무 말도 안하고 나왔지만 함께 오지 않은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게다가 "집에서 혼자 뛰면 되지, 꼭 여럿이 뛰는 대회를 나가야 되냐"며 잔소리까지 퍼붓던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가면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땀을 닦고 있는데 기념촬영을 하자며 함께 뛴 지인이 손을 잡는다. 생각보다 일찍 들어 온 것 같아 기록에 은근히 욕심이 생겼다. 곧 결과가 나왔다. '5327번 허선행 1시간 4분 32초 436'. 10km코스의 50대 연령층에서 3등을 했다고 한다. 깜짝 놀랄 일이다.

'이 아이가 커서 과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저체중으로 태어난 첫 손녀를 자랑하고 싶어 베개를 받치고 포대기에 업고나가 자랑을 하셨다는 우리 할머니가 문득 떠올랐다. "할머니가 그토록 예뻐하던 손녀딸이 마라톤에서 3등을 했어요." 등위보다는 건강해진 내 자신이 대견하여 눈물이 났다.

며칠 후 인터넷으로 기록을 살펴보던 남편도 동네방네 자랑을 하며 다니는 눈치다. 쉰둘에 이룬 나의 마라톤 점수는 '3등'이다. 2004년에는 다양한 일들이 있었고 특종감도 많았지만 이만한 특종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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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로부터, 현직 유치원 원장으로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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