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냉전시대 ‘동구권 국가들’, 즉 공산권 국가들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의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지식은 동구권의 대장 역할을 했던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유지했던 중국과 마오쩌뚱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가 전부였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인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티토에 대해서도 책을 집어들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은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나 손석춘의 <아름다운 집>을 읽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당연하다고 몇 년 동안 믿어 의심치 않던 여러 가지 관념들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조금씩 다가가며 인식하게 되는 내 사고방식의 여러 층들. 양파껍질처럼 벗겨나가는 그 층들과 속속들이 드러나는 새하얀 속살들을 만나볼 때 갖게 되는 쾌감은 아마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반공국가 중 하나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것이리라.
티토는 복잡하게 얽힌 유럽의 정치상황과 여러 민족문제로 오랜 세월동안 무자비한 살육의 현장이 되었던 유고슬라비아를 통합하고 공산화한 후 스탈린에 맞서 독자 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다.
그는 매일 끼니를 걱정하며 전전해야 할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온갖 종류의 육체노동을 하며 자라난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그는 권좌에 앉은 후에도 소박한 기질을 버리지 않았고, 다른 독재자들처럼 자신을 극단적으로 우상화시키지도 않았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된 티토는 마음껏 즐겼다. 61년 전 프란츠 요제프가 통치하던 제국의 시골 변방 쿰로베츠에서 태어난 이후 티토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시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젊었을 때 실업자 생활을 밥먹듯 하면서 느꼈던 궁핍, 비엔나의 아무런 안전 장치가 없던 공장에서 일하면서 당한 사고로 보기 흉하게 된 손가락, 1915년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겪었던 동장군, 2년후 러시아에서 경험했던 카자크족들의 채찍질, 위험하기 짝이 없던 공산당 지하운동과 알렉산다르 1세 시절 감옥에서 체험했던 극한 상황, 스탈린의 대숙청 때 모스크바 럭스 호텔에 깔려 있던 음울한 죽음의 그림자, 1941년 베오그라드에서 보았던 게슈타포의 싸늘한 눈초리, 수테스카강, 드르바르 동굴에서 대책 없이 쳐다보았던 독일군의 공습, 보스니아 산악 지대에서 파르티잔 활동을 할 때 사면 팔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험악한 분위기, 티토가 걸어 온 인생 역정이다.
그는, 뉴욕 분위기에 취해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 중남미의 달콤한 속삭임에 안주했던 트루먼 대통령, 참호 속에서까지 동자가 시중을 들었던 처칠, 취리히나 파리의 몽파르나스 카페에서 사색에 잠겼던 레닌이 상상할 수 없었던 고초를 헤쳐 나왔다. 이제 티토는 오랜 세월 치렀던 투쟁과 고난의 보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약자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 능력, 그것은 헐벗은 유년시절을 겪어본 지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중요한 미덕이 아닐까. 티토는 권좌에 오른 이후에도 자신에게 호화로운 궁정을 지어 하사하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며 유리창을 깨버렸고, 자신은 민족에게 공헌을 한 대가로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 어느 정도 호사를 누릴 수 있어도 자기 자식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호사를 즐길 권리가 없다며 일체의 특권을 금했다.
물론 그가 죽은 다음에도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그로부터 거의 한 푼의 유산도 물려받지 못했다. 티토는 모든 것이 국가로부터 나온 것이라며 끼고 있던 반지 하나까지 죽기 전 국가에 반납해버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도자로서 어느 정도 권위를 가지고 카리스마를 지녀야 자칫하면 조각나기 쉬운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를 계속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티토는 필요한 순간에는 과감하게 독재를 했고, 커다란 목표를 위해서는 자신이 평소 따르던 이상과 맞지 않는 조치들도 서슴없이 단행했다.
나는 티토의 이 부분, 이 융통성이 유고슬라비아의 통합과 번영 그리고 소련에 맞서는 독자적인 공산국가로서의 독립성을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국가의 지도자는 굉장히 어려운 자리다. 지도자는 지나친 독재자여도 안되지만, 지나친 이상주의자여도 안될 것이다. 지도자가 이끌어가는 대중이란 쉽게 휩쓸리는 바람과도 같은 존재고 지도자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시시각각 너무나 복잡하고 긴박한 상황을 형성하기 때문에 결코 모든 사람의 근본이 선할 것이라는, 그러므로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위해 이상적인 방법으로 나아가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지나친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티토는 이런 점에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신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의 청사진을 장기적인 시점에 걸어놓고, 그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면서 가장 현실적인 길을 택했다.
점점 독재화되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소련이 공산주의 본연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음을 간파한 티토가 소련으로부터 벗어나 독자노선을 걸어가기로 결정했을 때에도, 그것이 전쟁이나 학살처럼 자국민에게 최악의 상처를 주는 사태로 번지지 않도록 그는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또 그 과정에서 자국민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힘을 교묘히 대치시켜 두 세력 다 이용할 줄도 알았다. 노련한 외교기술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유고슬라비아라는 땅에서 3차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안목을 가진 지도자 한 명이 한 나라를, 나아가서는 전 세계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놓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티토가 죽은 후 유고슬라비아는 다시 산산조각이 났고 지금도 분쟁과 살육이 끊임없는 화약고같은 지대가 되었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역사가 한 명의 사람에 의해 얼마나 큰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도, 대중도, 그 무엇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을 품고 비전을 제시하는 한 개인의 역량, 시선, 몸짓이다.
...일찍이 어느 누구의 장례식에도 그렇게 많은 VIP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1901년 런던에서 있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이나 케네디 대통령, 처칠 수상의 영결식 때보다 훨씬 많은 인사들이 조문을 왔다. 4명의 왕, 31명의 대통령, 22명의 수상, 47명의 외무장관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냉전 세력을 대표했던 동서 양진영의 강대국들은 물론 비동맹 국가의 지도자들도 빠지지 않고 128개국을 대표하고 있었다. 동서 양진영의 정치 지도자들은 비동맹 국가들에게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해, 비동맹 국가들은 제 3세계의 지도자인 티토의 영면을 애도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것이다...
장례식에 모인 세계 각국의 다양한 정치 지도자들의 면면은 티토의 정치적 매력 외에 개인적 매력도 보여준다. 서방 국가 중 가장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던 처칠마저 2차 세계대전 당시 티토를 강하게 지지했었고 영국 대사 매클린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압도되어 평생 돈독한 우의를 다지는 친구로 남아 유고슬라비아가 영국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티토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주었다.
만일 티토가 아니라 스탈린처럼 독선적인 인물이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였다면 과연 반공주의자의 대표격이었던 처칠이 유고슬라비아를 지원해주었을까? 유고가 소련에 대한 독립이라는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갈 때 영국과 미국같은 서방세력이 그를 지원해주었을까? 지도자의 인격적 자질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이 책에는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티토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외에 2차 세계대전 전후의 각 나라 지도자들의 색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는 덤이 있다. 그런데 이 덤이 상당히 맛깔스럽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있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조금 더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면모, 티토라는 거인과 만나 드러나는 그들의 색다른 단면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티토는 분명 독재자였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은 비밀 경찰을 이용해서 탄압하고 감옥에 보냈으며 심한 경우 죽이기도 했다. 또 아내 요반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국가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권위적인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졌던 어마어마한 살육과 인종 청소를 생각하면 과연 그가 독재자라고 해서 나쁘기만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독재자가 역사에 남기는 빛과 그림자에 대한 묘한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나는 이 생에 무엇을 하다 갈 것인가, 나는 역사에 어떤 형태로 발자취를 남길 것인가. 영웅의 전기를 읽고 나면 결국 돌아가게 되는 귀결점은 나 자신이다. 티토, 그 강인하고 유연했던 영혼의 기운과 만나고 나자 어쩐지 작아보이는 내 자신을 반추해 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평범했던 내 인생의 전반부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아무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인물은 못될 것 같다. 영웅이야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작은 욕심이 있다면 내가 훗날 돌아보았을 때 인류의 역사가 진보하는 커다란 움직임 속에 하나의 작은 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점이라도 되어 박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인종, 성적취향, 성별, 민족과 같은 선천적인 이유만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 약자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을 잃지 않는 사람, 선을 향한 몸짓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은 것이다.
문익환 평전을 읽었을 때에도, 윤동주 평전을 읽었을 때에도, 강준만 씨가 쓴 리영희 전기를 읽었을 때에도 나는 같은 열망에 휩싸였다. 이것이 사람들이 전기를 읽는 이유가 아닐까. 위대한 인물의 전기를 읽고 나면 어쩐지 그 사람의 아름다운 영혼의 한 조각을 내가 품고가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여파로 아름다운 꿈을 꾸게 된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전기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