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이 글은 제 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천명관의 <고래> (문학동네·2004)에 나오는 한 토막이다. 깊은 산 속 외진 마을에 사는 금복이란 시골 처녀 하나가 그 좁디좁은 우물 안 세계를 박차고 뛰어나와 바다와 드넓은 대지를 무대 삼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숨은 끼와 사업가 기질과 숱한 남성들을 이끌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 등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이른바 여성이 남성보다 결코 뒤지거나 쳐지지 않고 오히려 훨씬 더 치밀하고 또 뛰어날 수 있는 여성 사업가로서의 대장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장편 소설이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는 그녀 한 사람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사람들이 끼어들어 있다. 이를테면 바닷가 부두를 중심으로 금복이와 한 동안 몸을 섞고 동업까지 했던 '생선장수'라든지, 등치가 산만하고 힘도 장사라서 금세 금복의 몸과 마음을 달아오르게 했던 '걱정'이라든지,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인 '칼자국'이라든지, 그리고 장소를 옮겨 평대(坪垈)에서 만난 '쌍둥이 자매'와 아프리카산 '코끼리' 라든지, 벽돌공장에서 함께 일하며 금복이와 살을 비비고 살았던 벽돌제조의 달인인 '文'이라는 사내 등 그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등장해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한 번 들었다하면 결코 다음날까지 넘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대단한 흡인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그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이 책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맛을 모를 것이다.
그 여러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이끌어 가는 세 여자가 등장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금복'이 그 한 사람이요, 두 번째는 그녀가 낳은 딸 춘희이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로 태어났고,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자랐지만 어느 새 185cm나 되는 키에 몸무게만도 120kg에 달하니 사내든 여자든 누구하나 넘볼 상대는 못되었다.
그 정도로 힘이 세고 기골이 장대하지만 그녀의 심성만큼은 그지없이 착했던 까닭에 아프리카 코끼리 '점보'와는 의사소통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배경인 벽돌 공장에서는 그녀가 '명품 벽돌'을 빚어내기까지 했고, 그로 인해 후대에 이르러서는 실로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까지 추대되기도 한다.
한편, 나머지 한 사람은 그들 모녀보다 앞서서 한 세대를 살았지만, 워낙 박색이라 신혼 첫날 밤 소박을 맞고 홀로 늙어 가면서 그 세대에 복수를 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았던 노파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는 어떤 복수도 하지 못한 채 몸은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나고 혼은 불귀의 객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도는데, 그녀가 긁어모아 집 천장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수많은 돈과 땅문서들은 결국 금복의 손에 들어가고 한다. 그래도 복수의 화신은 금복의 명줄에 끝까지 따라붙어 다니고 급기야 분기로 가득 찬 노파의 혼령은 금복이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지었던 '고래극장'을 불태우게 되는데, 그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천 여 명의 사람과 함께 금복도 결국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그 고래극장 안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이로써 그 끈질긴 노파의 복수극은 끝을 맺게 된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 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301쪽)
이 책을 인물 구성과 그 인물들이 갖고 있는 무게 중심에 따라 읽어나간다면 그렇게 금복과 춘희 그리고 노파 순으로 읽어 볼 수 있지만, 이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배경 속 자리 이동은 산골짜기에서 '바닷가 부두'로, 바닷가 부두에서 대지의 땅 '평대'로, 다시 평대에서 그 옆에 움츠리고 있는 '벽돌공장' 순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을 큰 틀로 해석해 보면 '물'과 '흙'과 '불' 등의 순으로 이야기가 엮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 시대 순으로 달리 해석해 보면, 숱한 나날동안 고생만 죽도록 하다 한 평생 사무친 원을 품고 이승을 떠나야만 했던 '노파의 시대'가 등장하고, 이어 산업사회의 발달에 발맞추어 도로도 닦고, 철도도 놓고, 은행과 자본이 들어오고, 또 새마을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던 '금복의 시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산 전문화의 주역 시대인 '춘희의 시대'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 여자의 무게 중심과 그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시대적 배경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다. 여성을 중심으로 숱한 남성들이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반복들을 해 나가면서, 결코 여성은 남성에 의해 뒤지거나 뒤쳐지지 않고 오히려 남성보다 더 섬세하고 더 치밀하고 더 대담하게 일을 처리하고 또 헤쳐 나갈 수 있으며, 그런 까닭에 남성보다 훨씬 앞서갈 수 있고 얼마든지 남성화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여성이 남성화된 주체로 설 수 있고, 남성과 겨누어서 얼마든지 한 세상을 주름잡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결국 남는 것은 '허무'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육체를 받쳐가며 욕심과 욕정의 탑을 높이 치켜세웠다 한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수많은 원한들뿐이니, 그것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녀를 물고 늘어져서 허무한 생으로 끝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허무는 결코 헛것이나 헛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게 세상사 이치요, 이 책의 이야기가 주는 하나의 교훈인 듯싶다. 수많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 그 관계 속에서 등치고 등쳐먹고, 죽고 죽이고, 또 속고 속이는 그런 얼치기 모습들이 담겨 있지만 그래서 인생사 헛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그가 살아 온 삶의 궤적들 또는 그 삶 자체 하나만이라도 누군가 기억해 준다면 결코 그것은 헛것이 아닐 것이다.
"네가 나를 기억했듯이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4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