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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은 민주노동당이 창당 5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민주노동당은 4번의 선거를 치렀고 1%대 지지율에서 15%대 지지율로, 7000 당원에서 7만 당원으로, 0석에서 10석으로 숨가쁘게 성장해 왔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민주노동당 창당 5주년을 맞아 두차례 기획(①선거로 본 민주노동당 ②평당원 좌담회)을 보도합니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 입니다.... 편집자 주

▲ 지난 97년 대선 당시 권영길 의원(당시 국민승리21 대표)이 국민승리21 결성을 알리는 선포식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다.
ⓒ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5년은 선거의 5년이기도 하다. 2000년 창당 직후 총선을 치렀고, 2002년 대선을 계기로 당의 존재를 온 국민들에게 알렸다. 선거를 통해 제도권 정치를 스스로 배웠고, 운동권 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한발짝 나아갔고, 당원 수를 늘려갔다. 선거가 민주노동당에게 외부와의 소통을 강제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역사는 2002년 대선 TV토론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나뉜다. 문명학 기획조정실장은 "2002년부터 운동권 선거에서 벗어났고 일정 정도의 지지도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신장식 대표비서실장은 "2002년 이후로 당의 주장과 정책을 어떻게 잘 대중화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는 지지도 등 객관적 자료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7년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에서 언론사업을 맡았던 박용진 전 대변인은 "당시에는 선거에 기법도 없었고 공략 지역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던 국민승리21의 선거 슬로건 '일어나라! 코리아'는 광고기획사의 작품. 당이 직접 슬로건을 기획하지 못했던 것이다.

박 전 대변인은 "당시 지지율이 1% 내외라고 여론조사가 나왔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만 해도 50만인데 100만표는 나온다'며 이를 믿지 않았다"고 전했다. 물론 선거 결과는 여론조사대로였다. 권영길 의원을 비롯한 많은 고참 당직자들은 아직도 선거 직후 패잔병이 되어 삼선교 인근 사무실로 짐을 옮기던 날의 참담한 심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2년 이전까지의 선거는 당을 알리는 사업이기도 했다. 1997년 박용진 전 대변인은 국민회의(민주당 전신) 기자실을 찾아가 김대중 후보를 비난하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나눠줬고, 추운 겨울 아침마다 장미꽃과 보도자료를 들고 기자를 찾아가는 '아침장미팀'을 꾸려 감동작전을 펴기도 했다.

2000년과 2004년 총선에서 '관악 을' 후보로 나섰던 신장식 실장은 "2000년에는 민주노동당이라고 인사하면 '민주당' 혹은 '민국당'이냐고 되묻고, 다시 설명하면 '조선노동당과 같은 거냐'는 질문이 들어왔다"며 "그때는 당명 설명하다 볼 장 다 봤는데 2004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2002년 "TV 토론 나가게 됐다" 소식에 당사는 환호의 도가니

▲ 2004년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영화인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노회찬 사무총장이 박찬욱 감독에게 홍보대사 위촉장을 전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신 실장은 "당 활동을 하면서 2002년 선거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꼽은 가장 짜릿한 순간은 TV토론 참여가 결정되던 날. 결정 내용을 전해받은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이 당사에서 "TV토론 나가게 됐다"고 외쳤고, 당직자들은 온통 환호성을 쳤다고 한다.

당시 토론준비를 주도한 문명학 실장은 "지지율 3%인 거 다 아는데 유력후보인 것처럼 자신의 국정운영능력을 얘기하면 안된다, 다른 후보들에게 국민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물으라"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권 후보는 보고서를 보고 자존심이 상해서 눈감고 아무 얘기를 안했지만 일단 받아들였다고 한다.

문 실장은 인구에 회자될 용어들을 뽑아서 권 후보에게 숙지시켰고 토론 이틀 전부터 시간을 재면서 모의 질의응답을 반복했다. 이렇게 쌓인 당의 토론 준비능력은 2004년 준비된 입담 노회찬 사무총장의 어록 히트로 이어졌다.

선거광고도 본격화됐다. 배우 정찬·문소리씨와 영화감독 박찬욱씨 등이 대선이나 총선에서 광고에 출연했다. 박 감독은 "당에서 언젠가 (홍보하라고) 불러주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당에서 전화오면 '당비 내라, 주말에 선전전 있으니 나오라'는 말만 하더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체계적인 당원관리와 홍보기획이 부족했던 것이다.

2004년 TV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행복의 나라로'는 가수 한대수씨가 민주노동당 광고를 위해 직접 부른 것이다. 저작권료도 수백만원대로 민주노동당 재정상황에서는 너무 비쌌고 절차도 복잡했기 때문이다.

"혀 한번 더 내밀면 뽑아버리겠다고..."
권영길은 어떻게 혀 내미는 버릇을 고쳤나

▲ 2002년 12월 3일 오후 열린 제16대 대통령후보 초청 첫 TV합동토론회에 참석한 (왼쪽부터)노무현, 권영길, 이회창 후보가 토론회에 앞서 손을 잡고 밝게 웃고 있다.
ⓒ주간사진공동취재단

2002년 대선 TV토론 당시, 이후 개그맨 김학도씨의 패러디로 더 유명해진 권 후보의 혀 내미는 버릇을 고치는 데에는 오현아 지방자치위원회 부장의 공이 컸다고 한다. 오 부장이 권 후보에게 "노조에서 전화왔는데, 그놈의 혀 한번 더 내밀면 뽑아버리겠다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문 실장은 "권 후보가 혀를 내민 것은 긴장을 하니까 물을 많이 먹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 후보는 보통 토론 때 생수 2통을 마셨다고 한다.

문제는 혀 내미는 습관 뿐 아니라 물을 많이 마시면 침 농도가 묽어져서 발음이 샌다는 것. '조흥은행 매각'을 '조흥은행노조 매각'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이회창'을 '노회창'이라고 하는 등 실수도 있었다. 그때마다 선대본이 아찔했던 것은 당연지사.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또 하나 어려움은 '외부의 로비'를 차단하는 것이다. 방송토론을 앞두고 "우리 사업장 문제도 얘기해 달라"는 각종 단체의 청탁이 들어오는데다가 권 후보가 이를 잘 뿌리치지 못해 어떻게든 발언 중에 끼워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선대본은 결국 연습기간 중에 권 후보의 휴대폰을 뺏고 연습장소도 비밀로 했다.

숱한 시행착오... '개미군단' 당원으로 버티다

▲ 2002년 12월 대선후보 2차합동토론회가 열리는 여의도 문화방송앞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 운동원들이 로고송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나 2002년이나 그 이후에도 실수는 숱하게 많았다. 2002년 당시 후보 비서들은 다 지역 출신이라 서울 지리에 둔했고, 권 후보는 길을 알려주느라 차에서 잘 수가 없었다. 비서들의 시간 개념이 부족해 후보가 아침 밥상을 차리고 비서들을 깨우거나 "지금 떠나자"고 재촉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기존 정당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재원과 역량 부족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2002년 민주노동당은 후보에 대한 '이미지 마케팅'을 포기하고 TV토론 당일 방송국 코디네이터에게 분장을 맡기곤 했다. 문명학 실장은 "다른 당은 후보수행이 20∼30명인데 우리는 2∼3명씩 움직였다"고 전했다. 지역유세에서도 숙박비가 10만원을 넘어서거나 밥값이 5000원 넘어가지 못했다.

이런 부족을 채워준 것은 전적으로 개미군단 당원들이었다. 당원들은 자신은 물론 지인들의 후원금까지 모아 특별당비를 납입했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선거운동을 펼쳤다. 심지어 하루 종일 버스를 타며 "버스에 계신 승객 여러분, 저는 민주노동당 당원입니다"로 시작하는 '앵벌이성' 유세를 펼친 당원도 있었다.

선거 때마다 '비지론' 폭탄... "완고히 선 긋자"

▲ 지난 2004년 총선 당시 단병호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가 명동입구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지난 2004년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서대문갑 정현정 후보와 운동원들이 연희동 전두환씨 집앞에서 선거유세를 벌이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민주노동당 선거의 최대 악재는 매번 반복되어온 '비판적 지지론'이다. 2002년 대선 때는 '정몽준 폭탄'이 터졌고, 2004년 총선에서는 유시민 의원이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을 상대로 "우리당 후보를 찍어달라"고 호소했다. 인터넷에서도 "3.12 탄핵을 잊지말고 지역구 후보는 3번(열린우리당), 전국구 후보는 12번(민주노동당)을 찍는 '3.12 투표'를 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신장식 실장은 "현장에서 표가 빠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주민들이 "한 표는 미안하게 됐다"고 말했고, 신 실장은 "이 지역의 지지율을 볼 때 한나라당이 당선되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신의 기억'은 많은 당직자들이 공통으로 갖고있는 정서다. 지난해 당내에서 한나라당과의 '야 4당 공조'보다 열린우리당과의 '개혁 공조'에 대한 논란이 컸던 것도 같은 맥락인 셈이다.

문명학 실장은 "비지론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올 것이고, 당 내부에서부터 확실하게 선을 긋고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실장은 "몇 차례 선거를 거치면서 당 활동이나 지지도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고 적어도 줄어들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이를 단순히 양의 증가가 아니라 질적 심화로 이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04년 4월 15일 밤 심상정 비례대표 후보의 아들 이우준 군이 축하 꽃다발을 들고 당사 상황실을 찾아 엄마의 당선을 미리 축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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