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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에게 저당 잡힌 삶

앙코르 제국이 멸망하던 날, 어쩌면 앙코르 민중들은 지긋지긋한 부역에서 해방되어 만세를 불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잠시. 제국의 영화는 밀림 속의 폐허로 사라졌고 이후의 크메르인들은 매우 기나긴 기간 동안 이런저런 이민족들에게 주체적인 삶을 저당 잡힌 채 이리 저리 휩쓸려 지내야 했다.

민족의 삶을 이민족들에게 저당 잡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그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우리 또한 구한 말과 일제 식민 시대를 겪으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서러움을 겪어야 했던 캄보디아 민족들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더 측은해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캄보디아는 1431년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공격을 받아 천도를 하고 국호를 크메르로 고쳤지만 이후 태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페인의 힘을 빌리려다가 오히려 스페인의 강압적인 지배에 시달리게 됐으며, 어찌어찌 스페인군을 내몰자 다시 베트남의 구엔 왕조와 태국의 침범으로 수백여년간 국토가 나뉜 채 태국과 베트남의 지배를 받게 됐다. 1864년 이름뿐인 크메르의 왕은 또 다시 프랑스의 힘을 빌려 태국과 베트남에서 독립하려고 했지만 또 다시 프랑스의 식민 지배만 받게 되었다.

▲ 앙코르 와트 사원의 불상 주위를 청소하는 캄보디아 아저씨. 지뢰로 한 팔을 잃었다.
ⓒ 김정은
프랑스에서 독립하고 난 이후에도 캄보디아는 강대국들의 입김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와중에서 200여만명의 학살이 자행된 폴 포트 정권의 '킬링 필드' 참상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아직도 미처 제거되지 못한 대인 지뢰 때문에 팔 다리가 잘려나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신음소리와 고통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처럼 수동적이고 복잡한 수난의 역사를 살다 보니 이들은 이민족인 프랑스인들이 다시 찾아줄 때까지 밀림 속에 묻혀진 영광스러웠던 조상의 역사, 앙코르 와트를 통째로 잃어 버리는 부끄러운 과거를 보내야 했다.

생계를 위해 위대한 조상을 파는 사람들

▲ 앙코르 와트 유적지 내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특이한 복장의 캄보디아 여인.
ⓒ 김정은
그러나 조상들의 역사를 되찾은 지금, 캄보디아 국민들에 있어서 앙코르 와트는 이리저리 짓밟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캄보디아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다. 그네들의 국기나 지폐는 물론이고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도 앙코르 와트 유적을 상징하는 앙코르 와트 사원의 첨탑은 신앙처럼 자리잡고 있다. 물론 위대한 조상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일도 이 앙코르 유적지 근처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며 그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앙코르 와트 사원 구석의 불상을 수시로 청소하고 있는 아저씨는 지뢰로 인해 한 팔을 잃었지만 여행객이 다가갈 때마다 향을 건네 주며 씩씩하게 참배를 하기를 권한다. 그 아저씨의 권유를 미소로 얼버무리고 밖으로 나오니 저만치에서 사람이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길가에 쓰레기를 주워 자전거 위의 쓰레기통에 담는 청소부 아줌마가 한눈에 들어온다. 음지에서 조상의 유적지를 관리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 비이욘 사원의 석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사람들., 그들은 그곳에서 정말 박쥐를 잡았을까?
ⓒ 김정은
한편 바이욘 사원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돌무더기에 올라 서서 무언가를 채집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유적 복구를 위해 올라간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으나 가만히 살펴 보니 복구하러 올라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저 돌무더기 정상에 올라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발꿈치를 올리고 올려다 보려 하니 누군가 한국인 여행객 한 명이 "박쥐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바이욘의 미소와 박쥐라? 정말 저 사람들은 박쥐를 잡기 위해 저 높은 곳을 올라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너무 멀어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채집 대상이 박쥐이든 아니든간에 그네들에 있어서 바이욘 사원의 석상은 또 다른 생계 유지의 터전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물론 이런 사람들 말고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비록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의 대부분이 주로 구걸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이미 타 프롬 사원 벽면의 일부가 된 느낌의 캄보디아 할아버지
ⓒ 김정은
그러나 타프롬 사원에서는 수많은 구걸자들과는 왠지 다른 느낌을 지닌 평범한 캄보디아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간혹 외국 화보집에서 본 듯한 너무나 익숙한 모습의 할아버지... 폐허가 된 타프롬 사원의 기둥 한쪽에서 마치 유적의 일부인 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앉아 있던 할아버지 옆에는 요기거리처럼 보이는 작은 비닐봉투가 함께 있었다.

물론 그 할아버지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옆에는 흔하디 흔한 구걸 그릇도 보이지 않았다. 간혹 그를 모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별 거부감 없이 그냥둘 뿐 그 나머지는 언제나 온전한 그의 삶 자체이다. 그 삶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다 보니 그는 이미 타 프롬 사원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지뢰의 상흔보다 더 무서운 건 빈곤의 대물림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앙코르 유적지의 주인공들은 한시도 가만 있지 않고 화보집이나 CD, 민속악기, 가방 등을 들고 여행객 주위를 얼쩡거리며 호객 행위를 하는 나이 어린 캄보디아 소녀들이다. 여행객들의 얼굴을 식별해 그에 맞는 간단한 언어를 구사하는데 한국인 여행객의 경우는 "언니, 싸요. 3개에 몇 달러"식의 간단한 한국말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학교 다녀야 할 나이에 학교를 가지 않고 달러 벌이에 나서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극성스럽기까지 한 모습. 거기에 캄보디아 국경에서 1달러를 외치는 걸인 소녀들과 톤레삽 호수에서 여행객들에게 포즈를 취해 준 후 1달러라고 무섭게 외치는 소녀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한창 배워야 할 천진스런 나이에 공부보다 먹고 사는 게 더 급한 소위 말하는 1달러 소녀들... 자기네들의 문자를 배우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여행객들의 호주머니에서 더 많은 달러를 받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이들을 보며 빈곤의 악순환, 빈곤의 대물림에서의 탈출이 말처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뢰의 상처에서 벗어나게 될 먼 훗날 캄보디아 사람들의 발목을 또다시 잡는 것은 아마도 열악한 교육 수준으로 인한 높은 문맹률이 아닐까?

지금도 캄보디아 거리 곳곳에는 문맹자도 알아보기 쉽도록 그림을 그려 놓은 광고 간판이 걸려 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느낀 한 여행객의 주제넘은 걱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열악한 3대 빈국 캄보디아 앙코르 후예들의 오늘의 모습이었다.

덧붙이는 글 | 앙코르 와트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8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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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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